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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서울발 구례구행 11시 45분 막차 일상에서 벗어남이란 때로는 즉흥적일 필요가 있다. 아무런 계획도 순서도 없이 잠복을 감행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일탈과 탈주의 긴장감은 유혹적이다. 그래서, 가끔은 모든 ‘정주’된 것들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그렇기에 일상과 탈주 사이에는 연속과 단절이라는 미세하고도 헷갈리는 흔들림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역시, 어느 것이 혹은 어느 지점부터 일상이며 탈주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렇게 서울역으로 달려간다. 새 일을 시작한지 석 달 만에 정리했다. 해고나 내부투쟁을 지도하던 입장에서 막상 당하는 입장으로 뒤바뀐 지난 한달은 긴장과 상실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한끝의 후회도 없기에 크게 지칠 것도 없었다. 그렇게 결국 다시 한번 서울발 구례구행 막차에 올라탔다. 이것은 어쩌면 또 다시 지리로 향하기 위한 정해진 수순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차피 한 곳에 머물 삶은 아니라는 사실이 다리에 힘을 주게 만든다. 그렇게 지리로 향한다. 허나 지나친 떠남의 강박은 사람을 두서없이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탈적 출발이란 쉽게 낭패와 친해지기 십상이다. 서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이번에도 시작부터 그러하다. 그러나 출발 10분 전 예약된 표를 놓치고 요행의 표를 뒤지면서도 여유와 서두름이 반목한다. 아마도 지리행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내 등 뒤에 실린 짐들은 구례에 안착할 것이라는 무언의 확신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구례구역 앞에 서있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례와 순천이 갈리는 곳이다. 그 앞에 다시 서 있다. 막차를 타고 내려오느라 선잠을 잤음에도 남도의 찬 새벽바람을 마주하니 어느새 정신이 돌아와 있었다. 서울발 이른 새벽차에서 내린 행객을 기다리는 첫 버스에 올라타고 다시 구례시내의 터미널로 향한다. 이른 봄의 뿌연 모래바람으로 희뿌옇기만 한 차창 밖으로 정녕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늘 하던 대로 터미널 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점심 도시락까지 챙겨 넣었다. 여기까지만 익숙해진 풍경이요 행동일 뿐이다. 산수유 마을로 가는 길 상위마을의 정확한 행정명은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이다. 구례시내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달리면 지리산 온천랜드라는 관광단지가 위치한 구산마을을 거쳐 중동마을에 다다른다. 이 곳에서 다시 상위행 버스를 갈아타야 오늘의 목적지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처럼 제멋대로 떠나버린 상위행 버스 덕분에 온전히 다리품을 팔아 상위마을로 가려면 북동쪽으로 3Km 정도의 외길 포장도로를 따라 분지형의 고개 길을 올라야만 한다 중동 버스정류장 앞 가겟집을 끼고돌아 시멘트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이미 노란 꽃들은 눈을 시리게 만든다. 멀리보이는 산 아래 둔덕뿐만 아니라 도로 옆 집안 돌담너머 빼곡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양새는 길 오른편을 따라 흐르는 도랑의 물소리와 더불어 이른 아침의 대기를 반갑게 만든다. 그렇게 느린 보폭으로 물길 한번, 꽃길 한번 쳐다보며 걷기를 한 시간, 어느덧 위안리 하위마을을 지나 상위마을에 도착한다. 산수유 마을. 상위마을은 보통 그리 불리운다. 2월이라는 겨울의 황량한 끝자락, 잎보다 먼저 노란 꽃을 피워 3월에 만개하는 산수유는 10월쯤 되어 붉은 열매로 결실을 맺는다. 고작해야 4mm 내지 7mm의 작디 작은 몸체에 암술과 수술이 함께 들어 있는 꽃잎 하나는 마냥 어리고 연악해 보이지만, 하나하나의 꽃이 무리져 피어 있는 한 그루의 산수유나무는 청초롬해 보인다. 그러나 수천 그루의 흐드러진 순락을 바라볼 때 그것은 성숙미의 전형마냥 놀라웁다. 그러나 그 연한 산수유는 인간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기계를 써서 산수유 육질을 씨앗과 분리해내지만, 오랜 시간동안 산수유는 인간의 몸을 빌어 분리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차, 술이나 한약재로 사용되는 육질을 받아내기 위해 산수유 동네의 아낙들은 일일이 그 열매를 입안에 넣고 깨물어 씨앗을 발라냈다. 그 수고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원기를 회복시키는데 효능이 있다는 산수유 열매를 입안에 담근 덕에 아낙은 젊음을, 그 아낙과 입을 맞댄 사내는 원기를 보전했다는 이야기를 연전에 귀동냥으로 들은 기억이 흘렀다. 어찌 보면 이 민간의 삶의 자욱이 지독한 사람냄새가 아닌가 싶다. 그러한 산수유나무가 유독 이 마을에 거대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산수유는 이 마을의 얼굴이자 살림의 바탕이다. 말하자면 전국의 산수유의 반 이상이 지리산 자락에서 꽃을 피우며 그 중 또 반 이상이 이 마을에서 열매를 맺는다. 그리하여 일년 중 3월은 산수유 마을의 이름이 산꾼들과 여행객들, 그리고 신문지면의 여행코너에 무수히 오르내린다. 그리하여 군청은 노란 꽃의 만개시기를 어렵사리 계산해서 ‘산수유꽃 축제’라는 행사를 열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사람의 인위적 놀이와 쉽사리 친해지질 못하다. 만개 날짜를 예측하느라, 그리고 그 날에 맞추어 소위 축제기간을 잡고, 또 실패하느라 군청은 자연의 섭리와 몇 해째 씨름을 버리는 중이다. 잃어버린 다름재 상위마을은 지리 자락의 서남쪽 만복대 능선을 마주한 채 그 밑에 움푹 앉아있는 형세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 거추장스럽기까지 한 사진기를 양쪽에 둘러맨 관광객들의 화려함에도, 그리고 50여 년 전 여순반란의 거친 역사가 깊은 생채기를 내었어도 일상의 삶은 조용히 흐른다. 그 삶을 가로질러 마을 뒤편으로 접어들면 두 개의 산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묘봉치골로 오르는 길이고 왼쪽은 다름재길이다. 왼편 저수지를 끼고 돌아가면 엔골로 오르는 입구가 나온다. 낯선 길로 향하는 발걸음은 일정 정도 긴장된 호흡을 부르기 마련이다. 어떤 길 모양새가 눈앞에, 그리고 발아래 펼쳐질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짐짓, 길이 육신을 통해 열리리라는 믿음은 곧잘 산길로 향하는 원초적 힘이 되곤 한다. 엔골은 작고 아늑하며 거칠어 보이지도 않는다. 칠선이나 한신의 원시적인 그리고 깊은 계곡의 압도적 풍모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그 낯선 길에서 결국 갈 길을 놓치고 말았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육체적 방향성을 잃은 것이며, 정신적 판단력을 잃은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길을 놓쳤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틈도 없이 또 다른 결단이 요구되어진다. 계속 치고 나갈 것이냐, 아니면 뒤로 돌아 다시 시작할 것이냐. 결국 후자를 선택하고 처음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뒤돌아감이란, 아니 길을 잃음이란 이미 한번의 미세한 단절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길 위로 지속되는 낯섦과 길에 대한 의심과 의혹이 겉돌았다. 그토록 선명한 길 위에서. 울창한 전나무 숲을 지나 조릿대로 덥힌 능선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하늘이 열려있다. 산길에서 푸르게 열린 하늘을 본다는 것은 때로는 하나의 실낱같은 희망이 되기도 한다. 저기만 가면, 하늘 바로 아래 서있기만 한다면 자신이 길을 걸어 정향한 목적지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열린 하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끝이 보이질 않는다. 한순간 다름재를 잃어버린 줄만 알았다. 그렇게 다다른 다름재는 작고 조용할 뿐이다. 마른 땅위 마른 풀들이 누워 있는 그 곳은 눈으로 자신의 지나온 길을 뚜렷하게 확인시킨다. 움푹 패어 들어간 골짜기 너머로 마을 저수지가 훤히 열려있다. 허허로움은 새로움을 기약한다. - 만복대 만복대로 가는 길은 절반의 낯섦과 절반의 익숙함이 공존한다. 요강바위를 지나 정령치까지의 갈림길은 다시 한번 길에 대한 의심을 부추겨 준다. 길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강바위를 지나니 거친 잡목과 응달진 둔터기 위로 잔설이 발밑에 밟힌다. 운행의 어려움도 잊은 채, 마치 그 잔설 언저리에 발을 대면 온 몸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아 눈 위로 내딛는 발로 온 힘을 흘려보낸다. 아마도 곧, 짙은 녹음과 교체되면서 눈의 잔해들은 자신들의 갈 거처를 향해 바삐 사라질 것이다. 만복대는 바람을 부르고 있었다. 온 사위에서 만복대 그 중심을 향해 바람을 불러 모으는 중이었다. 지난 가을 억새의 화려한 무리도 흩어진 자리에 만복대는 홀로 허허로움을 안고 있었다. 바람을 더 세차게, 그리고 재빨리 불러 모아 행객의 오랜 머무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람 속에 홀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 만복대를 뒤에 두고, 사방, 그 어디를 봐도 허허로운 그 곳에서 허허롭다고 세 번 외쳐본다. 그러나 만복대는 자신의 허허로움을 세상의 허함으로 감정이입하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삶의 순환이 잠복해 새로움을 기약하는 만복대이기 때문이다. 낯선 녹음 - 화엄사길 작년 장마철, 코재를 말 그대로 코를 박고 걸어가면서도 이 길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 길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늦은 삼월의 바람과 햇볕의 곁을 지나는 화엄사 길은 전혀 새로운 길이었다. 오른쪽으로 조릿대 숲이 이어지고, 왼편으로 계곡 소리가 들리는 이 길은 아침 햇살을 받아 맑고 온화하고 여리기까지 하다. 그 길은 자꾸 뒤돌아보게 만들고, 한 박자 느린 다리의 속도를 주문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턱없이 빨리 끝나는 그 길의 여운 끝자락에서 만난 연초록색 산죽터널은 마음의 위로인양 선명하기만 하다. 길이란 낯섦과 익숙함이 교차한다. 어찌 보면 우리네 일상사와 근사한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정주로부터 탈주를 꿈꿨을 때, 일상과는 전혀 다른 대안이나 방법을 찾으면 좋으련만, 또 다시 낯섦과 익숙함이 교차하는 길 위에 서있는 일은 모순이 아닐까. 그러나 지리를 택하는 것은 그 낯섦이 낯섦으로 끝나지 않고, 익숙함이 익숙함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새로운 길을 걷다가도 사람을 만나면 익숙함이 되고, 낯선 길을 걷다가도 문득 길의 새로움과 마주한다. 아마도 혼자 오르다보니, 그 길의 새로움과 익숙함에 좀 더 민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엄사 절집 옆 다실에 앉아 오미자차를 앞에 두었다. 오르는 산객도 내려오는 산객도 없는 작은 입구 길을 바라보며 지리의 휴식을 함께 나누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한 길이지만, 행여 그 쉼을 어렵게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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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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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길에서 익숙함과 낯섦에 대해 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