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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오랜만입니다. 애써 조급한 맘을 추스르며 말씀드리자면, 저 지리산엘 다녀왔습니다. 이쯤에서 선배는 벌써, 제가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아시고 피식 웃으시겠지요. 그간의 세월 모두를 생략하고 지리산에서 내려왔다는 얘기부터 황망히 시작하니 말입니다. 예, 저는 제가 걷고 땀흘렸던, 그리고 늘 그리워하던 그 지리에 대해 얘기하려고 선배를 부른 것입니다. 짐을 꾸리기 며칠 전부터, 멀쩡하던 어깨에 통증이 생기고, 왠지 모를 불안함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왜 꼭, 산에 가기로 결정만 하면 그리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음습한 것이, 몸 구석구석에 찌들어 있던 것이 슬금슬금 혈관을 타고 올라 결정적인 지점을 타격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번 경우, 예전과는 다르게 담담하더군요. 제가 이년 전 이맘때, 얼마나 지리에 밟혀 마음 급해 했었는지 선배도 아실겁니다. 논문 최종 제출기간을 훨씬 넘겨버리도록 억지를 부리며 잡고 있던 허접의 시간을 마무리하며, 저는, 씁쓸한 마침이 되었던 그 감정의 포물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 자리에 지리는 환영처럼 들어앉아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떠났던 지리에 비해 이번 여정은 왜 그리 일상처럼 뻣뻣이 다가와 서 있었을까요. 그래도 산행 전날 잠을 설치는 저의 못된 버릇은 여전해서, 그 날도 산행에 대한 여러 가지 잡생각에 밤을 꼬박 새고, 짐을 한 가득 짊어진 채 구례로 향하는 아침 첫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지리의 밑자락, 구례는 여전하더군요. 많은 이들이 지리로의 첫발걸음을 위해 안착하는 그 구례는 말입니다. 그렇게 요란하지도, 그렇다고 조용하지도 않는 구례구역 앞에서 우리를 마중한 것은 섬진강의 별미라는 제첩국을 파는 식당과 산꾼들을 지리산 자락 어디론 가로 실어 나르고자 기다리는 택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새벽녘부터 비워놓은 배를 한 숟가락의 국밥으로 넉넉히 채우고, 서둘러 택시에 올라탔습니다. 이 대목에서 선배, 또 한번 탄식하시겠지요. 그렇게도 다리품을 애써 팔며 노곤한 짓을 골라하던 너도 이젠 늙었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약간의 망설임이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순간의 판단과 결정이 지나간 이후, 제 몸에 대하여 아무런 미안함도 들지 않고 편안히 그 곳, 화엄사에 당도했습니다. 아마도 문명의 이기의 힘에 기대어 그 빌어먹을 성삼재 도로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화엄사까지의 이 무노고가 상보되리라는 일말의 자위 때문이었겠지요. 화엄종의 본산이자 한국 불교의 중흥지로 손꼽히는 큰 절집, 화엄사 경내는 형형색색의 관광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그 절집에 안도하는 것은 입구에 걸어놓은 지리산댐 반대시민운동 플랭카드와 마당 내 고즈넉하게 마주 서있는 5층석탑 때문입니다. 아무 무늬 없이 소박하게 쭉 뻗은 동탑과 아기자기한 밑단 장식을 자랑하는 서탑사이의 거리는 애닯기만 합니다. 위용을 자랑하는 대웅전에 서서, 지리산 자락 밑에 기운을 담아 안은 부처에게 산행의 안전과 겸손의 자비를 구해봅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이, 부처를 둘러싸고 있는 그 화려하고 장엄한 조선 중기 탱화에 눈길이 쏠리는 것은 어쩌지 못했습니다. 그 화엄사를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 시작되는 등산로 입구는 그저 여리고 조용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 길과 만나기 직전까지 지리산 최대의 절집을 둘러싼 분주함이나 지리산 주능선의 첫 오름길이라는 상징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흘간의 종주산행이 던져놓은 무게감에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다가왔을 겁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그 길의 차분함은 곧 저를, 분주함이나 무게감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주었습니다. 계곡을 지나 오르는 길은 여느 국립공원처럼 자연탐방로라는 이름으로 잘 꾸며놓았더군요. 그 덕분인지, 아직까지 저의 몸뚱이가 지리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그저 너무도 당연한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발걸음을 땅위에서 헐겁게 움직입니다. 아마도 가슴이 턱턱 막혀야 인식되겠지요. 적어도 산에서만큼은, 머리의 신호보다 몸의 신호가 더 처절합니다. 실핏줄을 타고 올라 팔딱 팔딱 살아 숨쉬는 육화된 그 기억을, 저는 더욱 믿습니다. 1Km당 20분씩 쉬엄쉬엄 걷는 산행을 시작한지 두 시간이 좀 지났을까요. 심상치 않게 구름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중재를 지난 지점부터 장대비로 돌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배낭커버며 장비를 찾지 못한 저는, 등에 짊어진 배낭과 옷이 흠씬 젖는 것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리에서의 우중산행이 주는 적막감의 상념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선배, '코재'를 왜 코재라 하는지 실감이 나겠더라구요. 그 거친 너덜지대의 급경사는 악천우 속에서 강행군을 하고 있는 저의 체력과 의지를 몽땅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아무 생각도 못하고, 말 그대로 코가 닿도록 땅만 보고 걸었습니다. 아, 그래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길. 오르는 시간보다 숨을 헐떡이며 쉬고 있는 시간이 많았던 그 길 위로 어느덧 하늘이 열리더군요. 소위 산꾼들이 얘기하는 한 피치의 순간이었습니다. 성삼재에서 올라오는 반반한 포장도로에 발을 내딛는 순간, 더 이상 땀과 빗물이 구분되지 않는 제 몸뚱아리는 덥석 내려앉았습니다. 그렇게 노고단으로 가는 길은 마냥 쉽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를 마중한 것은 노고단이 아닌 노고단 산장이지요. '남한 유일의 해발 1,500미터의 산상도시'. K선배가 자신의 책 <지리산>에서 노고단 산장의 언저리를 이렇게 표현했지요. 고도의 수직적 상승감을 단 1시간만에 별스럽지 않게 넘나들 수 있는 그 장소는, 그러나 그날만큼은 우리가 하룻밤을 족히 묵어갈 꿀맛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 시간, 빗속을 뚫고 화엄사에서 올라온 몇몇의 일행들을 반기며 산장지기는 빵 한쪽과 사탕, 그리고 따듯한 덕담을 건넵니다. 그것만으로도 서울에서부터 11시간을 달려 이곳에 도착한 노고가 감내되는 듯 합니다. 지난 하루의 고단함을 노고단에서의 1박으로 풀어내고, 가늘게 실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게 운행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벌써, 성삼재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이곳, 노고단은 북적대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산행을 허가하지 않는 국립공원 관리공단과 짙게 먹구름낀 지리의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혀 봅니다. 그 사이 노고단 신식산장의 팻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이란 것을 찍었습니다. 운행시의 긴장감은 저로 하여금 기록을 남긴다는 것에 대한 부질없음과 연결짓게끔 하였는데, 이번엔 얄팍한 사진기를 동행하였지요. 아마 아직까지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허망한 짓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는 사이 거짓말처럼 그 시커멓던 하늘이 열리더니, 한순간에 운해가 저 만치 노고단 정상 너머로 유유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저의 발걸음을 지리산, 자신의 품으로 받아주겠다고 허락하는 것만 같아 보입니다. 산장에서 나무계단을 타고 올라가 만난 옛 신단의 자리 '노고단'은 나무 담장에 의해 범인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미 지리가 영험한 산임은 신라 때 이곳에서 국사(國祀)를 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정되겠지요. 그 까닭이 민간에서 흥흥했던 성모신앙을 국가차원에서 흡수하고 통제하려는 차원이라고 하지만, 분명 지리의 한 끝자락부터 시작하여 어느 한 자락 우리의 삶과 역사를 담지 않은 곳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지리는 살아 숨쉬는 듯합니다. 빨치산 반란군들이 한동안 머물렀다는 그 노고단 평원을 뒤로하고 산길로 접어듭니다. 지리산 능선에서 가장 편안하고 아늑한 길, '임걸령'으로 가는 길입니다. 마치 산책 나온 아이처럼 그 푹신한 길을 하염없이 걷습니다. 이미 장승은 사라져 버린 '장승터'를 지나면서 물 한 모금으로 한 쉼을 즐기는 여유도 가져봅니다. 빽빽한 참나무숲 좁은 길과 하늘이 열려져 있는 평원이 번갈아 나타나는 아기자기함은 지리가 선물한 여백이 아닐까요. '지금도 멧돼지가 나온다'고 붙여놓은 팻말을 웃으며 바라보며 '돼지평전'을 지나면, 어느덧 임걸령 물꼬리 앞입니다. 식수를 가득 채우고 물맛을 살피고 걸어가기 시작하면서 오늘 운행에서 처음 만나는 오르막길이 나타났습니다. 지리의 3대 주봉의 하나인 '반야봉'에 가까워져 왔다는 신호겠지요. 반야봉 갈림길인 '노루목' 그 좁은 길목에 우리도 사람들 틈에 섞여 잠시 앉아 쉬었습니다. 비가 오고난 뒤 장렬하는 태양빛은, 비록 우리의 운행 두쨋날, 땀의 노고를 톡톡히 제공했지만, 적어도 자연에 있어서 만큼은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잎들의 짙푸르름과 신선함에 기름을 붓습니다. 8월, 그 무더위의 산숲은 정지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계곡이 살아 흐르는 것과는 반대로 말입니다. 만물이 생성하고 발육하는 봄의 반란과 황홀한 붕괴가 시작되는 가을의 색화와 비교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지리의 바람과 운무의 명멸은 한여름의 운행을 아직까지 잘 버티게 만들고 있습니다. 피아골 그 심원을 맘껏 볼 수 있는 탁 트인 시야를 자랑하는, 지리가 닿고 있는 3개의 도가 만난다는 '삼도봉'의 삼도푯말 앞에 섰습니다. 언제부터 이 봉우리가 삼도봉이 되었을까요. 자신의 이름, 날나리봉를 잃어버린 이 봉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행정상의 의미로만 존재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산하에 이렇게 삼도가 아름답게 만나는 지점이 또 있을까요? 경상도와 전라도를 아우르면서, 어느 하나 남의 것이 아닌, 하나의 것으로 품고 있는 지리만 같다면, 이 남한땅이 좀 덜 척박해지리라 믿습니다. 삼도봉에서 화개재로 가는 길은 나무계단의 연속이었습니다. 선배가 이곳 지리에 처음 발을 들어놓을 당시의 그 경사 급한 바위 벼랑 내리막길은 이젠 이렇게 편리한 등산로로 탈바꿈해 버렸습니다. 사실 안전이라는 미명을 제외하고는, 나무계단은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쥐약과도 같은 존재인데 말입니다. 그 만큼 이제 지리는 더 이상 원시림도, 고산(高山)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런 대중 휴양지가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잘 꾸며진 나무계단과 현대식 산장, 이정표, 그리고 고도 1,500미터의 도로들. '화개재'에 도착하니 인적하나 없는 텅빈 그 터에 우리만 서 있더군요. 일찍 출발한데다, 서둘러 운행을 한지라 아직까지 다른 산꾼들은 보이질 않습니다. 점심을 해먹기 위해 뱀사골로 내려가는 왼편 200미터 나무계단을 짚으며, 조금씩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도 밟아보고 싶어했던 뱀사골. 정확히 말하자면, 고정희의 뱀사골과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했던 말이지만, 고정희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안타까움과 다행함이 교차됨을 느꼈습니다. 삶과 문학의 치열한 진정성과 파괴력을 갖고 있는 소중한 작가를 잃어버렸다는 저의 안타까움은, 그가 세상을 하직한 장소가 뱀사골이라는 것을 안 순간 부러움과 다행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더군요. 저는 지금도, 그가 지녔던 그 많은 문학적, 실천적 삶의 미덕이 지리를 가슴에 품고 살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서투른 판단을 믿습니다. 그가 밟고 느꼈던 이곳의 모든 땅과 그로부터 울려오는 숨소리를, 그가 말했듯이, '멈추지 않고 가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미래'이기에 지금 제가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뱀사골 언덕평지엔 지금, 낯선 산꾼들과 어느 대기업 연수사원들로 붐빕니다. 화개재에서부터 부딪끼기 시작한 사람들의 행렬은 '토끼봉'까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반야봉의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인 토끼봉(卯峯) 정상 초원에 내리꽂히는 햇볕을 피해 음지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 틈에서 저는, 적어도 지리에 있는 동안만큼은 제가 계속 걸어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로부터 생경함이 느껴집니다. 그러고 보니 산행이란 늘 목적지가 분명한, 그 분명한 목적지를 찾아 길을 따라가는 작위적인 행 일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저는 짐을 싸들고 나설 때마다 그러한 모든 것을 버리는 듯한, 아니 버리기 위해 산을 택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토끼봉에서부터 계속되는 바위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면서도 총각샘이라는 목표물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걸어가고 있는 제 자신은 이미 지독한 모순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바윗길 덕분에 자신의 존재근원을 상실한 채 말라버린 총각샘을 놓쳐버렸습니다. 허나 다행히도 저의 물통 속에는 갈증과 피곤을 적셔줄 일용할 생수가 존재합니다. 어느덧 갑자기 '명성봉'이 나타났습니다. 이 또한 저의 방향감과 거리감을 비웃는 행위의 연속입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덕분에
잘 꾸며져 있는 곳곳의 거리지시표와 산꾼들의 표지기가, 물론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서지만, 더 이상 지도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지리산과 지도의 관계를 떼어놓기란 저에겐 매양 어려운 일입니다. 지리를 곁에
두지 못했던 오랜 시간동안, 지리의 그림자에 가위눌려 밤을 꼬박 새며, 손가락으로 7,8000분의 1 지도 위의 매 봉우리들을
가늠하며 길들을 찾아가던 때가 있었지요. 그렇게 그 산을 올랐다 내려오기를 수 없이 반복했습니다.
아직도 그 가위눌림은 저에게 유효하며 현재 진행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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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민의
지리산포탈사이트 |
지리에서
보내는 인사 - 주능선, 그 끝과 시작에서 [1]
(2편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