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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에 관하여 성삼재에 도착하니, 이미 사위는 어두워졌다. 헤드런턴을 켜고, 보온장비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스틱을 펴들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 씩 옮기기 시작한다. 두 개의 불빛이 발 아래에서 어지럽게 움직이고, 발 밑에서 밟히는 눈소리가 또렷이 들려온다. 시야가 어두울수록 귀는 반갑게 열려진다. 마치 온 세상을 죄다 달팽이관을 통해 감지하고 대화하는 것처럼, 감각체계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 봤다. 흑단빛 천위에 북두칠성이 박혀져 있다. 어찌보면 새로울 것도 없는 별무리에 마음을 빼앗겨 멈춰 서서, 담배 한대를 입에 문다. 지리의 밤하늘을 언제 쳐다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람이 다니는 눈길 위로/누더기가 된 낙엽들이 걸어간다/낙엽이 다니는 눈길 위로/누더기가 된 사람들이 걸어간다/그 뒤를 쓸쓸히 개미 한 마리 따른다/그 뒤를 쓸쓸히 내가 따른다/누더기가 되고 나서 내 인생이 편안해졌다/누더기가 되고 나서 비로소 별이 보인다/개미들도 누더기별이 되는 데에는/평생이 걸린다(정호승, <누더기별>) 노고단 산장은 한밤중이었다. 서둘러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취사장으로 향한다. 밥, 인스턴트국, 김치, 미역무침, 김이 전부인 단촐한 식사거리. 몇몇 산꾼들의 취사열로 훈훈하기 까지한 실내공기에 감싸여 저녁식사를 마친 후, 이름 모를 여러 사람들과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독일로 떠나기 직전, 선후배들이 환송회를 해준다고 함께 서대산으로 향했던 적이 있었다. 산에서 만난 사람들, 산에서 헤어지는 것이다. 그때 마셨던 술자리의 여운 마냥, 나는 한동안 산행시 와인 한병을 들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배낭에서 생략되어진 그 포도주의 시큼함이 새삼 그립다. 새벽 5시 30분의 노고단은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었다. 불빛에 의지하지 않고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지만, 새벽 공기를 느끼는 데 있어서 불빛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그저 가슴을 열어두고 크고 작은 호흡을 심장의 결따라 들이고 내쉬면 된다. 호흡은 공간을 감지한다. 주변이 막힌 공간에서 느끼는 호흡의 숨결은 동시에 제한적이다. 그러나 사위가 뚫린 자연에서의 호흡은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운행준비를 마치고 산장 밖으로 나오니, 노고단으로 순찰 나가셨던 박선생께서 내려오신다. 예의 주능선의 러셀정도며, 예상되는 날씨며, 장비 등에 관해 조언해 주셨다. 옆에 계시던 김선생께서 이번엔 왕시루봉을 접으라고 말씀하신다. 산을 하루만 다닐 것도 아닌데 무리는 금물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말씀대로 따르기로 마음에서 결정을 내렸다. 어느 길을 가느냐가 때때로 중요하게 판단될 때가 있다. 산 아래의 삶에서도, 그리고 산으로 향할 때도 길을 결정한다는 것은 적당한 긴장감과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결정의 찰나에서 만나는 미묘한 감정은 즐겁다. 그러나 이미 몸이 지리에 있는 한, 더 정확히 말해 겨울 지리에 있는 한, 내게 다가오는 길의 의미가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길에 대한 욕심을 접는다. 노고단에서 두 가지를 보았다. 하나는 찬란한 운해이고, 다른 하나는 아픈 성삼재였다. 운해를 사이에 두고 지리와 마주하는 이름 모를 연봉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드럽게 겹쳐져 있다. 그반대 편으로 몸을 돌리니, 우리가 어제 편안히 올라왔던 그 성삼재 길은 내 허리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보는 것 같아 여전히 고통스럽다. 너도 견디고 있구나//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사색이 많으니까//빨리 집으로 가야겠다(황지우, <겨울산>) 겨울산을 오른다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삶과의 만남이다. 세상은 흰 것에 싸여 자신을 감추고 있다. 세상을 단 한 가지색만으로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 ‘흰 것’뿐이지 싶다. 마치 모든 것이 똑같아 보이는 세상. 그러나 하얗게 쌓여 있는 저 밑바닥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세상 것들이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 이면을 읽어낼 수 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지할 수나 있는 것일까. 문득 우리가 ‘우리’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온통 하얗다’라고 말하는 것 속에는 동일성 속에 숨어있는, 아니 동일한 실체 그 자체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연기되고 있는 차연(differance)의 관계와 사실을 생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흘러 지나갔다. 눈은 살아있다/떨어진 눈은 살아있다/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기침을 하자//눈은 살아있다/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김수영, <눈>) 지리의 눈을 바라보는 내 육체의 눈은 자신의 역할을 잊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러셀된 길을 따라가는 마당에 시야를 확보한다든가, 가야할 길을 찾기 위해 긴장해야하는 시각체계는 더 이상의 의미를 접어버렸다. 그저 눈과 눈이 마주하는 지점에만 정확히 머무르기로 한다. 그 자리에는 어느새 촉감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걷고 있는 눈길의 표면과 올곳이 만날 수 없음에, 뱀사골 산장의 미끄러움에 지레 놀라 착용했던 크렘폰을 미련없이 벗어던졌다. 이제 발밑을 통해 올라오는 촉각체계의 신호에 따라 온 몸의 감정과 판단을 의지한다. 그렇게 걸어가는 뱀사골 길은 한없이 적막하고 외롭기만 하다.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내리고/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철철 샘물이 흐르고/더웁게 달궈진 산과 뼈 사이/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 소리/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구름처럼 바람처럼/승천합니다(고정희, <뱀사골에서 쓴 편지>) 다시 감각에 관하여 이번 산행은 감각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감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소위 오감이라는 내연적 소통체계의 외연화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사물이나 그 어떤 대상을 처음 접할 때 드러내는 즉자적 반응은 일차적으로 눈이라는 감각체계의 작동과 판단에 의존한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야에 의존하는 일상의 체득이나 경험, 판단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 속에 그대로 전이되어 나타난다. 한국어에는 ‘-보다’라는 어미의 사용이 일반적이다. ‘맛이 있어 보여’, 혹은 ‘차가워 보여’라고 말하는 순간, 그 미각과 촉각은 시각에 크게 의존하는 형새로 외형화된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는, 단순한 외형화의 측면만이 아니라, 시각적 통로를 통해서 지독한 판단의 근거와 그 근거의 정당성을 강요(내지 회피)하는 내면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보여지는’, ‘보는’ 시각의 체계는, 혹은 언술의 체계는 어느 틈 엔가 마치 지식의 양과 질의 축적과 동일한 모양새를 띠고 자리매김 해있다. 어찌보면 이성을 절대 정신화 하였던 근대서구의 지식범주의 맥락에서 봤을 때, 감각조차 지식화의 가늠 잣대로 작동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껏 시각의 신경전달세포와 검은 안구에 과부화를 걸어놓고 살아가고 있다. 한동안 문화를 읽는 최상의 방법 마냥 통용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온 나라를 ‘알다’와 ‘보다’의 동일코드로 몰아갔다. 사람들은 알기위해 보기(혹은 보기위해 알기) 시작했으며, 보는 즉시 지식화의 코드를 작동시켰다. 이 실증주의적 사고는 시각체계의 절대성에 의해 힘을 발휘한 것이며, 또한 이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번 산행에서는 이러한 시각체계의 절대성을 상실하였다. 한없이 동일한 듯 보이는 겨울 산이 지닌 외형의 드러남 속에서 더 이상 시각의 논리를 작동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이면에 작동하고 있을 현상 내지 사실과 만나기 위해 촉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을 작동시켰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시각의 절대성을 규정해온 간접적이고 일차원적 감각의 지평이 직접적이고 다차원적인 지평으로 확대된다는 사실이다. 어찌되었던, 감각과의 헐벗은 만남을 통해 또 다시 지리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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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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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 감각에 관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