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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타난 미끄러운 바위벼랑을 쇠줄에 매달려 힘겹게 오르고 나면 내리막 흙길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이 갖고 있는 신체의 모든 자연적 동작과 사지의 힘을 이용하여 이 길을 내려간다는 것은 옛말이 되었습니다. 국립공원의 안전하면서 한편 화려한 시설인 나무계단이 묵직한 두 다리의 기계적 반복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요구에 맞춰 다리를 펄럭이며, 이 계단 끝에 자리잡고 있을 '연하천'으로 향합니다. 선배가 즐겨 찾던, 명성봉 밑자락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 연하천은 이름대로 '오묘한 대자연 속의 맑고 시원한 물'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위해 의연히 살아있습니다. 아니, 살아가도록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지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제한되기 시작한 취사·야영금지로 인하여 지리산 산집들은 무엇보다도 운행에 있어서 절대적 필요조건이 되었습니다. 여북 하여, 모든 지리산 운행일정이란 것이 산장에서 시작하여 산장으로 끝날 수밖에 없도록 되었으니 말입니다. 선배나 제가 지리에 처음 발을 딛었던 그 때, 하루를 족히 쉬어갈 반듯한 자리를 애써 찾아 헤매던 그 풍경은 이젠 사라진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운행 중 옛 야영지의 잔형들과 마주칠 때마다, 마치 지리산이 남긴 옛 폐허지를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애림니다. 연하천을 떠나 벽소령으로 향하는 능선길은 우리 근현대사라는 커다란 산맥 속에 존재하는 '피의 능선'입니다. 그 능선 옆구리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 내려가는 빗점골은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최후를 머금은 채, 짓푸른색의 웅장한 원시림의 위용을 자랑합니다. 지리안에 존재하는 길들이 간직한 사연과 땀과 자연 앞에서, 그 길로 뻗쳐지는 욕심을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든 길을 다 밟아 갈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는 이미 목적지가 정해져 있고, 동행이 있고, 주어진 길이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길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 그러나 그 이면에는 모든 길을 껴안는 듯이 보이는 종주의 욕심이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가기에는 두 바위의 우애가 듬직해 보이는 '형제봉'을 지나면서 저는, 이제 제 몸뚱아리가 지리에 천천히 적응해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 이 같은 몸의 변화를 확고히 믿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장거리 산행에 있어서 오늘과 내일의 하늘이 다르듯, 도시일상에 길들여 있을 나의 몸의 변화란 그저 기대감과 바램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지리의 땅과 기운을 흔쾌히 받아들여 제 자신, 단련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도시의 화초에서 산길의 들풀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신기하게도 적응해 가는 제 몸의 대견함에 기뻐, 물을 듬뿍 주고 싶습니다. '벽소령'과 달빛은 어딘지 모르게 태초부터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지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벽소명월의 서늘함을 마주하지도 못한 채, 총총히 침낭 속으로 파묻혔습니다. 선배도 아시다시피, 산의 하루는 일찍 시작되고 일찍 끝납니다. 이미 5시만 되면 주변의 부스럭됨이 사위를 밝힙니다. 이것은 산의 하루가 일찍 끝난다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겠지요. 안전운행과 장거리 운행이라는 목적 하에, 어스름이 지상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는 산의 시간에 적응하려면, 하루의 시작은 부지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기하게도 몸의 시계는 이에 재빠르게 적응합니다. 산아래의 삶에서 팽팽히 긴장해 있을 아홉시가 되기도 전에 침낭으로 미끄러지는 몸이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갈길이 바쁜 세쨋 날의 운행이 어제보다 더 고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벽소령의 이른 새벽부터 운행을 준비하고 몸상태를 점검하면서 이내, 일말의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그 까닭에 벽소령에서 꽃대봉을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는 벼랑끝 돌무덩이길을 걸어가며, 그 벼랑과 마주선 깊은 골짜기의 시원스런 풍광에 눈을 돌리는 여유를 애써 부려봅니다. 하지만 초반 3. 5Km 동안, 소위 말하는 페이스 조절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선배도 아시다시피, 초반 능선길 직전까지 저 만의 고유한 행보를 유지하며 산행을 위한 컨디션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저의 오래된 산행습성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선배들로부터 산을 처음 배우며 함께 나눴던 산에 대한 넉넉함과 여유로움 때문에 생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함과 겸손함으로부터 산을 타는 것이 체력으로 산을 타는 것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된 것이지요. 그러나 발빠른 동행의 행보에 적응하지 못한 저는, 오히려 제가 견지해야 할 것을 모든 것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선비샘을 조금 지나면서부터 시작되는, 온 사지를 이용하여 기어오르고 내리기를 수십번 되풀이 하도록 요구하는 급경사진 흙비탈과 노출된 바윗길은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여유없음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나친 영신봉과 많은 봉우리들은 지금 제 머리 속에 백지장처럼 하얗기만 합니다. 그 거친 긴장감은 '세석고원'을 내려가는 나무계단 앞에서도 멈추질 않습니다. 이 인공의 나무계단이 이제 곧 산집의 쉼터로 인도한다는 것을 상징처럼 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석산장 한 켠에 다리를 뻗을 때까지 지친 몸과 마음을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세석입니다. 언젠가 자연정비작업이 끝난 후 세석을 찾았을 때, 지리산 최고 호텔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잘 꾸며놓은 산집이며, 정성들여 가꿔놓은 주변의 인공조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저 칭찬의 눈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지리의 현실 때문에 답답해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독하게 안개낀 새벽녘 세석의 맑은 공기로 위안을 삼았었지요. 제가 세석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행복으로 여기겠습니다. 지리산 자락에서도 물맛이 좋은 세석의 샘터에서 피곤해진 다리품과 마음을 흠뻑 적셨습니다. 지리를 한번이라도 밟아본 산꾼들이라면 세석과 연하봉 사이의 길을 마음 속에 깊이 담아둘 것입니다. 길이란, 오르며 내리기 마련입니다. 이쪽에서 오르막은 저쪽에선 내리막이며, 또한 반대입니다. 그 길의 진리가 감추어진 세석의 길. 촛대봉에서 연하봉을 거쳐 장터목 가는 언덕 길을 힘겹게 오르면서도, 마주하며 내려오는 산객들의 경쾌하고 시원한 발걸음을 생각할 때, 제 자신 같이 즐거워 집니다. 오전 초반의 힘겨움이 조금씩 상보되면서 여유를 되찾게 해준 이 길을 걸으며, 양옆의 노란 들꽃들로 눈길을 보내봅니다만, 아직도 저는 지리를 알려면 한참 멀은 모양입니다. 지리의 나무 하나, 풀포기 하나의 이름도 여적 모르면서도, 발걸음만 앞으로 향하니 말입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온 제가, 이럴 때, 가장 안스럽습니다. 이제, 이 나무계단을 500M만 걸어 내려가면, '장터목'이지요. 제 눈앞에 어떤 모습의 장터목이 나타날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좀처럼 차분해집니다. 그 산집의 모습이 눈 앞에 아련히 펼쳐져 들어올 즈음, 저를 먼저 맞이한 것은 하산을 기다리고 있는 쓰레기더미들이었습니다. 인간이 남긴 잔해물에 장터목 이곳 저곳은 처연해 보였고, 공용 화장실을 수리하느라 그 공기마저 무안합니다. 그러나 이미 지쳐버린 육신은 그 곳의 한 모퉁이를 차지합니다. 행동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는 동행과는 달리, 저는 빠져나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어거지로 불을 피우고 허기를 채웠습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의 육체가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저 역시 장터목에게 부질없이 사람의 흔적을 남긴 꼴입니다. 산집 벽에 다리를 올리고 기대어 쉰 덕에 조금씩 회복된 체력은 천왕으로 오르는 행보에 속도감을 실어주었습니다. 천왕봉에 먼저 올라가 있던 동행이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합니다만, 왠지 정상앞에서 후다닥 올라가기가 머뭇거려지더군요. 딴짓하듯이 칠선에서 올라오는 길을 멀끔히 쳐다보았습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왜 저기가 정상이고, 저 정상을 올라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 장소가 낯설게 다가오기만 합니다. 산의 정상은 한 곳 뿐입니다. 그렇게 그 한 곳을 향해 오르지만, 결국은 그 한 곳으로부터 내려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리는 오르기 위한 산이기보다는 품에 안기는 산이지 싶습니다. 그 까닭에 이 정상이 마냥 낯설었다고 여기겠습니다. 언젠가 선배가, '치밭목'의 길을 가리켜 깊은 맛이 난다고 했었지요. 그 맛이 멀까싶은데, 아마도 깊은 '서늘함'이지 않을까요. 짓푸르다 못해 검은 여름 침엽수와 하얀 암봉들의 날카로운 끝매에 걸린 서늘한 음영이 이 길 가득 드리워져 있습니다. 여름의 숲은 장렬함과 서늘함이 공존합니다. 이 공존은 태양의 세기와 위치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길은 공존을 포기한 채, 태양을 피해 조용히 잠적해 있습니다. 그 길을 꽤 오래 걸은 것 같습니다. 몇 번이나 나타나는 철계단 암릉길을 하염없이 내려가도, 도무지 산집으로 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마침내 길을 잘못 찾아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떠올랐습니다. 퇴보와 직행의 심각한 고민 가운데 구세주처럼 만난 꼬마 산객들 덕에,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치밭목 산장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꽤 많은 무리들이 장터목에서부터 천왕을 넘어 이 곳을 향하였으니, 오늘만큼은 치밭목이라해도 자신의 한적함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산장의 앞, 뒷마당을 가득 채운 산객들은 산집의 민선생의 꼼꼼한 배려와 정리로 인하여 손쉽게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불편한 잠자리가 될거라고 걱정해 주시는 주인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지금까지 쉬여온 지리의 산집 가운데 가장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치밭목은 여유로우면서도 평안하지만 절도있는 그 주인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소나무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 치밭목에 누워 우리가 오늘 하루 정신없이 걸어온 길들을 그려봅니다. 이번 종주산행의 마지막 날, 이제 하나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이 남겨져 있습니다. 모두가 떠나가 텅빈 산집을 뒤로하고 나오기가 왠지 섭섭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다시 밟기 시작한 하산길에는 저의 아쉬움을 짐작이나 한 듯 검은 나비 떼가 동행해 주었습니다. 산과 산아래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지으며 살고자 했던 버릇은 한동안 저에게 산에서의 침묵을 강요했었습니다. 아직도 그것은 사람을 피해 오로지 산과 마주하는 호젓한 산행을 즐기기를 원하는 형태로 탈바꿈해 지속됩니다. 하지만 소위 휴가철 절정에 산을 오르면서까지 그것을 바란다는 것이 큰 욕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산행 동안 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산과 오롯이 마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힘들 때 동행이 되어준 고등학교 등산반 친구들, 산행을 이제 막 시작하는 데도 불구하고 온갖 반찬을 넉넉히 나눠준 노고단의 젊은 산객,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자두 두알을 건네주신 분. 때로는 침묵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이 모든 만남에 대해 이제는 평안해 지렵니다. 마지막 의례처럼 세족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계곡길을 걸으면서 그 흘러가는 물줄기로부터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우왕자왕하는 제 모습이 선배에게도 낯설지 않겠지요. 왜 그렇게 물소리만 들으면 환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물이 저에게는 또 하나의 모태성이기 때문에 그러지 싶습니다. 지리와 물이 함께 하는 그 길을 걷는 동안 만큼은 자궁의 안락함 속에서 저의 태고를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지리의 한 끝자락에 자리한 소박한 출구이자, 입구인 마을 철조망 문을 건너서면서, 종주길의 마지막과 마주합니다. 유평리 마을길 한쪽으로 펼쳐진 지리의 연봉들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저의 눈이 순간 아득해 졌습니다. 당신의 품으로 저를 받아줘서 고맙습니다. 제 다리가 당신의 땅을 딛고 나아갈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지상에서 만큼은 단호한 제가 늘 상 이 산 앞에서는 가슴 시려합니다. 지난 나흘동안 지상의 모든 것과 결별하고, 이곳 지리의 모든 것을 만나기 위해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그 길들은 모두 저마다의 표정으로 자신이 품고 있는, 그리고 자신에게 들어온 것들을 조용히, 그리고 강직하게 살펴봅니다. 저는 그 보살핌 속에서 제 육신을 한 발자국 씩 움직였고, 그 육신이 밀고 나가는 만큼 정직하게 길이 열렸습니다. 그 길과 몸이 정직하게 만나는 접점은 땀으로, 바람으로, 그리고 땅의 기운으로 선명해 집니다. 이처럼 제가 한 것이라고는 몸과 땅을 정확히 부딪히려한 것밖에 없지만, 그로부터 많은 것이 제 몸으로 건너와 주었고, 제 몸을 통해 숨쉴 수 있게 하였습니다. 여전히 저는, 산에 오르는 한, 처음과 끝을 저의 의지로부터 내려놓겠습니다. 기실, 선배께 하릴없이 많은 얘기를 했지만, 또한 수많은 얘기를 묻어두렵니다. 제가 지리를 가까이 두고, 계속 그리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시 무언가가 절실해 질 때 지리엘 오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될 것 같습니다. 산에서 뵐 때까지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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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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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에서
보내는 인사 - 주능선, 그 끝과 시작에서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