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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더미에 젖은 섬진강을 따라가다 시계거리가 20미터도 채 안되는 이른 아침의 짙은 안개더미를 뚫고, 구례에서 하동가는 길로 시내버스가 접어든다. 그 길, 국도 19번은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오른쪽에 두고 따라 내려가는 적잖이 잘 닦긴 포장도로이다. 그 길을 따라가다 왼편 외곡리로 꺽이여 들어가는 직전마을 위 피아골이 오늘의 출발 목적지다. 차에 실린 사람들의 행색이 대부분 산객들인 것을 보면, 아침 6시 40분 구례발 첫차인 이 차의 쓰임새를 거의 짐작할 수가 있다. 섬진강은 지리의 젖줄이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하여 전라남도를 거쳐 경남 하동 포구로 흘러들어가는 남도 5백리 물길은 지리를 외면에서부터 감싸안아 그 내면과 심대히 마주한다. 지리는 섬진강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바라보며 자신의 자락들을 키워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섬진강을 한 눈에 조망하려면 왕시루봉이 제격이다. 지리의 많은 봉우리들 가운데 섬진강과 제일 가까이 마주하며 앉아 있는 1,000미터 이상의 높은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섬진강은 지리의 허리를 감고 구례평야를 돌고 돌아 굽이 치듯 흐르는 물결들로 한없이 장엄하게 다가온다. 아, 저기가 이 모산(母山)의 탯줄임을 단박에 알아 차릴 수가 있다. 섬진강은 아주 오래전에 모래가람, 모래내, 다사(多沙)강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그 옛것에서 보듯이 그 강은 유달리 모래와 친숙하다. 은색의 모랫벌 하구에서 강의 아낙들과 사내들이 철따라 제첩을 줍고 은어, 꺽지, 쉬리, 버들치, 가시고기, 모래무지 등 맑은 민물고기를 잡는 진경산수의 풍광은 섬진강과 오랜 시간동안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한 강의 것들에게 외지 사람들은 '별미'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섬진강엔 재첩이 유명하다. 사실 재첩은 섬진강만이 아니라 한강 이남 어느 강폭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작디 작은 토종 조개류이다. 그러나 섬진강에서 건저진 재첩은 낙동강의 그것과 같지 않다. 섬진강의 재첩을 담아 끓인 국물은 비릿하기 보다는 단촐하다. 그 작디 작은 제 몸 속에 섬진강 맑고 서늘한 풍광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섬진강을 생각할 때마다, 아득해지는 사람이 하나 있다. 50평생 섬진강을 원없이 사랑하는 시인, 김용택이 그이다. 그의 섬진강 연작들은 그 강 언저리에 살아가는 이름모를 풀포기들과 아낙들, 그리고 공기의 내음새를 섬진강이 심어낸 언어로써 잔잔하게 드러내준다. "이 세상/우리 사는 일이/저물 일 하나 없이/팍팍할 때/저무는 강변으로 가/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팍팍한 마음 한끝을/저무는 강물에 적셔/풀어 보낼 일이다."(섬진강5-삶) 한동안 세상은 시린 등짝을 두드리듯 팍팍했었고, 그처럼 팍팍한 나락의 삶 속에서 만난 그의 시어들은 화농처럼 따갑게 곪은 상처들을 살갑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하여 그렇게, 가문 섬진강을, 저문 섬진강을 따라가고 싶어했다. 아직도 세상 언저리가 팍팍한 까닭에, 그의 섬진강은 여전히 굽이치듯 흐르고 있다. 11월, 가을 홍화(紅花)에 물든 피아골 논배미 연장 24Km의 피아골은 지리의 골짜기들 중에서도 계류가 크고 깊은 까닭에 보통 연곡사 밑에 대해서 연곡천이라 따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피아골은 이미 865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서부터 피아골이다. 11월 초순 피아골의 풍경은, 가만히 아래로 내려와 앉은 붉게 물든 산허리와 그 가을 홍화에 잠겨 붉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켜켜이 쌓여져 있는 논두더미로 인해 단연코 성스럽다. 그 성스러움에 놀라 입을 다물고는 차마 쳐다볼 수 없는 행객의 처지에 버스 창문과 눈은 시종일관 좁은 거리를 유지한다. 희고 넓은 바닥을 드러낸 갈수기의 계곡 옆으로 보자기처럼 펼쳐져 있는 것은 신비하리만치 한층 한층 얹혀져 있는 논배미들이다. 땅이 만들어낸 이 놀라운 조형의 광경을 육신의 눈을 통해 확인하지 않은 채 그저 말로만 담기에는 녹록치 못하다. 어느 하나 반듯한 것없이 비탈진 산새와 흐르는 계곡의 모양을 그대로 이어받아 곡유(曲流)한다. 그렇게 층층이 이어지고 이어진 논배미 더미들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피아골 계단식 논을 바라보며 거기에 그렇게 오래오래 착하고 조촐하게 살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생존과 삶의 굽이처럼 닮아 있는 땅의 정형이 피아골에서 숨쉬고 있다. 11월의 숲은 마르고 차다. 그리고 사근거린다. 무더운 여름 내, 자신의 온 몸으로 광합성이라는 생성의 삶을 이룬 청푸른 잎파리들은 이제 소멸의 삶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화려한 마지막 고별식마냥 자신의 색화를 치열하게 드러낸다. 그 치열함은 마른 기운이 번져가는 가을 산의 고단함이자 새로움에 대한 약속이다. 그렇게 산은 자신의 순환론적 삶을 담담하게 재구성하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지금, 산도 붉고 물도 붉게 비치며 사람조차 붉게 물들어 간다. 또한 늦가을 산은 시인 황동규가 말한 가을 빗소리 마냥, 나뭇잎 하나 하나가 저희끼리 몸 부딪쳐 만드는 소리, 땅 위로 내려와 잦아드는 소리, 그리고 결국은 마음 바닥에 잦아드는 소리로 울렁거린다. 그 소리에 섬처럼 박혀있던 시간들 마저 제 자리를 떠나 마냥 흘러다닌다. 그 시간의 떠돔 속에서 산숲의 가을은 잠시 멈추어 서있다. 피아골의 영원한 소년 산장지기 피아골을 따라 오르는 산길은 두 얼굴을 하고 있다. 정확히 피아골 산집을 중심으로 아래쪽으로는 평탄한 계곡옆 능선길이지만, 위쪽으로는 가풀막진 능선안부 계단길이다. 어찌되었던 그 두 길의 모양새를 모두 겪어보아야만 피아골을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이른 아침에 피아골을 오르는 산객들은 낙엽 무더미위로 연한 아침 햇살을 받은 자신의 그림자가 떨어져 번지는 포근한 산길을 밟으며 올라간다. 용수암과 질매재 방향의 두 물줄기가 모이는 너른 터에서 마주친 피아골 산집은 그 위치부터 사뭇 진지하다. 앞으로는 피아골의 흐르는 물을 놓고, 양 옆으로 능선이 돌아가고 있다. 그것은 피아골 초입부터 넉넉하게 계곡산행을 한 산객들을 거리낌없이 맞아주는 위치이면서도, 또한 속세와는 다르게 산이 갖는 적막감과 단절감을 여지없이 자아내는 위치이다. 그 위치에 놓인 산집은 낡고 간결한 돌집 한채와 그 앞에 놓인 작은 나무밑둥 의자들, 갈증과 휴식을 채워줄 샘터, 그리고 그나마 현대적이라 할 수 있는 모양꼴을 갖춘 화장실이 전부이다. 그러나 그 집은 위치나 모양새로만은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자신의 내적 존재의미를 조용히 간직하고 있다. 산집 앞 붉은 단풍나무 아래에서 그 집과 닮아 있는 함태식선생을 만났다. 그 만남의 과정 또한 즐겁다. 카메라를 들고 함선생의 근영을 담고 싶어하는 산객과 머리털을 물들인 사람과는 만나길 꺼려한다는 산장주인의 의지로 인해 단박에 마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그는 그 산집에서도 보기 좋은 장소를 직접 골라 정다운 모습을 취해 준다. 함선생은 물들인 머리를 좋아하지 않아한다. 도대체 염색체 그대로의 머리를 간직한 산객들을 눈을 씻고 찾아봐야 볼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난 달에 방문한 당신의 며느리도 머리색이 바뀌어 왔다며 말을 잇는다. 그에게 질문했다. "며느님한테 머라고 싫은 소리 하셨나요?", "아니, 머라고 하긴 왜 해. 머리 물들이는 것은 내가 싫은 것이지, 그렇다고 머라하진 않아. 그 사람 자유잖아" 그것이 그의 대답이였다. 그는 그런 식이였다. 지리산 언저리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일흔 두해를 산 그는 무릇 산이란 이런 것이다, 산은 이렇게 다니는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유쾌하게 그림까지 바닥에 그려가며, 자신이 지난 30년간 함께 해온 지리에 대해 얘기할 뿐이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한번, 그가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그 산집의 비범한 위치에 대해 확인할 수 있었고, 허연 머리를 드러내고 산집과 마주하는 '흰덤봉'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결을 읽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는 당신의 말마따나 장난끼가 많은 피아골의 산장지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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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민의
지리산포탈사이트 |
만복대,
그 대지의 너그러움 [1]
(2편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