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천둥소리'에 등장했던 주인공 신길녀에게 보내는 작가의 편지

신길녀에게...

신길녀, 너는 전쟁과 굶주림, 그리고 이념의 갈고리에 부대낌을 당했던 우리 현대사를 연약한 몸뚱이 하나로 감당해 나가야 했던 아낙네였지.

'천둥소리'를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너를 찾아 배회했었다. 그 질곡과 고통을 역사의 전면에서 도끼와 낫으로 마주서온 설득력 있는 여걸로 너를 이름 지을까, 아니면 역사의 행간을 한마디 발언도 없이 살다가 배설되어버린 한낱 몽매한 촌부로 너를 이름 지을까 하는 수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었다. 고뇌와 배회를 거듭했던 사오개월 동안의 벼랑 끝에서 나는 너라는 두메산골의 촌부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선택하기로 작정해버렸었지.

너는 남자가 없으면 한됫박의 양식조차 구걸하기 어려운 의존형의 여자 였지만 그러나 그 양식을 위해서 사랑한다는 말조차 할줄 모르는 고지식한 여자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전쟁으로 그 삶의 바탕이 흩어지고 말았을 때 너는 삭풍이 불어오는 겨울 들녘에 떨고 서 있는 한낱 수숫대와 같은 여자로 전락해 있었다. 떨고 있는 너를 껴안고 몸을 데워줄 어느 누구도 네 곁에는 없었지. 네 삶은 누추한 걸레조각처럼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내가 너를 이 땅 독자들에게 떠나 보냈던 십년전 나는 사람들로부터 네 존재가 진부하다는 평판을 들었다. 그것은 이 소설이 쓰여지기 이전에 분단의 고통이나 6·25의 발발로 진솔한 삶이 붕괴된 인간들의 참상에 대한 진단이나 고매한 해법을 제시한 소설들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평판에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너와 이 소설은 이념의 갈등 혹은 진단을 위해 고통 받는 사람이나, 전쟁의 와중에서 지조를 지켜 나가려고 애쓰는 사람의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한 것이기 때문이었지. 어째서 역사의 행간을 살다가 소리없이 흩어진 사람들의 영혼과 아픔은 천착하지 않는 것일까. 반드시 청사에 그 이름이 빛나는 호걸이나 지식인들의 아픔만 내세우려 하는 것일까.

신길녀야, 두메산골에 살았던 너와 같은 촌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농도는 이념의 올가미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의 고통과는 본질적으로 소외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너를 사랑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결심의 과녁은 참으로 다행이었다는 것을 너는 내게 터득하게 하였다. 내가 너에 대한 무한한 희열과 성취감을 느끼게 된 것은 네가 가지고 있는 질긴 생명력의 발견 때문이었다.

너는 핏줄을 나눈 동기간이나마 찾아가서 의지할 곳 없었던 겨울바람 속에 온몸을 드러낸 깡마른 수수깡이었다. 그러나 너는 끝까지 자기를 버리지 않고 지탱해왔고 침묵 속에서 전쟁의 피흘림과 질곡을 치러가면서도 허위에 물들지 않았고 자신을 위한 변명에 몰두한 적이 없었지. 그리고 너는 너 자신의 본래의 모습인 촌부로 고스란히 살아남지 않았던가.

달구지길에서 자라는 질경이나 쇠비름처럼 당기고 당겨도 뿌리가 뽑혀지지 않는 그 질기디 질긴 생명력은 너란 평범한 여자의 탐구에서 얻어진 성과였고 교훈이었다.

너는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였고 할머니였으며 나를 낳아준 아낙네였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너는 빨치산들의 린치로 죽어가는 천예 점개를 향해 '여보'라고 부르고 있었잖니. 사랑을 말하는 그 수많은 언어들 중에서 네가 선택한 언어는 바로 그 여보라는 한마디 말이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할줄 몰랐던 너의 언어에도 가슴 속으로만 파고드는 진하디 진한 애증이 있기에 지금까지 나는 너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