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희미한 옛길이다. 길옆에 숲과 나무가있고, 길 끝에 집과 사람이 있다. 오지에 살면서 부대기를 일구었던 화전민,흙과 나무로 지은 집들은 거의 사라졌다. 필자는 지난 몇 년 동안 강원도와 경기도, 충청북도 오지에 있는 산들을 찾아다녔다.

오지 산행을 하면서 아직까지 산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굳은 살 박힌 손과 굵은 주름살이 나 있는 화석과 같은 그들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고, 고단한 그들의 삶에 대해서 귀동냥할 수 있었다. 근대의 망명자와 같았던 화전민들 대부분은 정부의 강제에 의해서 산을 떠났고 집을 버렸다.

화전민들이 살았던 곳은 세상의 끝인 오지였다. 그곳에서는 인공적인 것이 사람들을 지배하지 않는다. 그들이 살았던 깊은 산골은 삶이 결코 꺾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건한 곳이었다. 불행하게도 오지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옛길은 오지로 들어가는 과거의 길이다. 오지가 없는 곳에 옛길도 없다. 옛길은 오지의 삶과 더불어 그리움을 남긴 채 사라지고 있다.

옛길 위에 삶과 집이 포개져 있었다. 산속에 사는 이들에게 길은 그들의 삶을 결정짓는 운명이었다. 산에서 나아가는 길이며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던 옛길은 화전민들이 지닌 억척스러움만으로 끝나지 않는 속깊은 정서와 저항을 품고 있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평등함을 드러내는 훌륭한 증거이기도 하다.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그들의 집은 옹색하다.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했던 그들은 자연과 일치되는 삶을 꾸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 삶에는 모방이 없다. 땅에서 나는 것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땅은 힘을 잃어버리고, 곡식이 자라지 않아 그들이 산속에서 버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집은 자연의 한 터에 자리잡고 있는 생명 있는 나무와 다를바가 없었다.

집은 사는 이의 얼굴을 가리는 가면으로 지어져서도 안되고, 너무 커서도 안되었다. 매년 조금씩고쳐 나가는 집에서 화전민들은 집처럼 길들여지는 몸을 지니게 되었다. 집은 사는 이들의 몸에 얹혀진 옷과 같다. 허물어져 백 년, 쓰러져 백 년이라는 오두막집의 길고 긴 연륜처럼 집과 사람은 한 몸이 되어 갔다.

군불 때는 초가집의 아궁이와 너와집 벽에 있는 관솔불을 지펴 등잔과 난방 역할을 했던 코클은 이제 사라지고 있다. 아파트에 살다가 강원도 오지 산골에 있는 화전민이 살았던 귀틀집, 너와집, 굴피집에서 하루 밤을 자고 나면 즐겁기 이를 데 없다. 이곳에는 쓰레기에 대한 문제도 없고, 내땅과 남의 땅을 구분하는 경계도 없다. 그저 조심스럽게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사는 것이 최적인 삶이다.

이상향의 땅, 그것은 자연과 더불어 자연처럼 되는 사람이 자리잡는 터일 것이다. 겨울철에는 너무 추워 안방과 건넌방 벽을 터 오고갈 수 있는 아주 작은 문을 만들어 놓은 것, 바깥에서 활동하는 것이 어려워 부엌을 크게해서
그 공간을 활용하는 것, 땅을 파서 곡식과 채소 등을 보관하는 것, 겨우내 쉬면서 봄을 맞이할 때면 몸전체가 근질근질해서 일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른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예지를 배우기 때문이다.

삶에는 변화하는 것이 있는 만큼, 변화하지 않는 것도 있다. 아날 학파가 말하는 '장기적 지속'이라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오지 산행을 하면서 나는 그것을 화전민들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뿌리뽑히지 않는 강한 생명, 그 엄숙한 삶을 배울 수 있었다.

1990년대를 헤진 몸과 마음으로 우리나라 산을 떠돌았다. 내 젊음의 절반은 불안했고, 나머지는 절망했다. 제임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말한 "좌절하여 배회하며, 짐승처럼 자신에게 신음했던" 시절이었다. 하여 스스로를 다른 곳으로 추방하는 방랑을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산을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달라졌다. 수시로 바뀌는 도시의 환경과 그 안에서의 삶에 회의를 지닐 때마다 나는 산으로 갔다. 큰 산과 맑은 물 그리고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사는 이들은 경이로움이며 위안이 되기도 했다. 옛길에 대한 관심은 그때부터였다. 옛 사람들이 다녔던 길을 찾아 땀흘리며 걷기 시작했다. 옛길에는 미쳐 깨닫지 못한 양심이 있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발을 옮기지 않으면 내 위치는 한치도 변하지 않는다. 같은 동작을 수없이 해도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발걸음이다.

걷는 것은 자발적인 움직임이다.걸음은 최적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추상적인 것을 걸으면서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산을 오르고 능선을 따라 걷는 일은 세상과 삶을 다시 연역할 수 있는 계기였다. 배워서 걸은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많은 것을 다시 배울 수 있었다. 걸은 적이 있는 길을 다시 걷더라도 부질없다고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산속에서, 옛길 위에 머물면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웠다. 걷는다는 행위는 매 순간 사유가 벌이는 축제와 같았다. 걸으면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사유는 근원적인 방향으로 향한다. 눈에 보이는 것, 발아래 밟히는 것,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이 본질로 와 닿는다. 길을 걷다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순환적 몽상에 빠질 때가 있다. 진정으로 사물과 친근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걸어야 한다.

('옛길' 중에서)  

연극평론가 안치운 - 호서대 디지탈문화예술학부 연극학 교수.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
저서 - [오래된미래] [옛길] [연극교육제도론].[추송웅연구].[공연예술과 실제비평].[연극제도와 연극읽기].[연극감상법].[한국연극의 지형학].[미셀비나베르의 한국사람들:희곡과 공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