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엄밀하게 말해서 오지마을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이라고 하더라도 오지의 깊은 마을이 안겨주는 심상은, 흙냄새 묻어나고 솔바람 불어오는 '우리네 마음의 정든 고향'이 아닐까 합니다.
 
   
 
 
꿀과 고로쇠 수액이 흐르는 지리산 자락의 오지마을
문수리의 마을들
   
 

옛 빨치산의 주둔지, 구례

구례의 풍요로움은 지리산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 곳에는 '원수에게도 예를 베푼다'는 말이 있다. 구례의 넉넉한 인심을 빗댄 말이다. 그러나 한때 지리산은 격렬한 동족상잔의 현장이 돼버린 적도 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른바 '빨치산'의 정착 투쟁지였던 지리산. 우리가 찾아간 토지면 문수리는 바로 지리산을 오르는 빨치산의 출입 통로가 되었던 곳이다. 1948년 10월 23일 여순사건의 패잔병들이 문수골을 통해 지리산에 오르면서 1955년 5월까지 7년 동안 기나긴 빨치산 투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당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도 패잔병을 수습해 포위망을 뚫고 섬진강을 건너 이 곳 문수골로 들어왔다. 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김지회, 홍순석 등이 이끄는 빨치산을 비롯하여 문수골로 들어온 빨치산은 2천여 명에 달한다. 구례읍과 인근에 빨치산의 야간 습격이 잦아지자 1948년 11월 5일 토벌대가 주둔하게 되고, 1949년 4월 18일까지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토벌대의 끊임없는 소탕작전과 빨치산의 반격 속에서 정작 힘들었던 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슴 조이며 지켜보아야 했던 지리산 자락의 민초들이었다.

더욱이 빨치산 토벌작전의 일환으로 진행된 거점분쇄작전은 지리산 토착민들의 고향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리는 비극으로 발전했다. 이념에 의한 싸움은 결국 지리산 자락의 오지마을을 모조리 파괴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문수리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문수리 자연부락들에 얽힌 유래

오미리에서 문수사라고 쓴 이정표를 따라 오르다보면 만나게 되는 문수리. 문수 저수지를 지나면 곧바로 깊고 아름다운 덕은내 계곡이 장중하게 펼쳐진다. 무려 30리에 이르는 기나긴 골짜기. 왼쪽으로는 형제봉이, 오른쪽으로는 왕시루봉이, 산등성이를 타고 문수리쪽 질마재를 넘으면 노고단이 솟아 있다. 문수리는 문수보살이 문수암에서 수년간 수도하여 성불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임진왜란 때 김해 김씨가 밤재에 정착하면서부터다.

자연부락으로는 밤재, 불당, 중대(영암촌), 상죽(웃대내) 등이 있다. 밤재는 옛부터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불당은 사찰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중대는 영암에서 이주한 장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영암촌이라 하다가 문수리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데다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중대라 칭하였다. 상죽은 오미리에 있는 하죽, 내죽의 웃동네라 하여 웃대내라 불렀다.

문수리가 속한 토지(土旨)면은 원래 토지(吐指)라 하였으며, 이는 천상의 옥녀신이 가락지를 떨어뜨린 곳(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옛날 이 곳 지리산 형제봉에 형제신이 살았는데, 이 중 한 남신은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옥녀신 자매 또한 이들 형제신과 결혼하도록 돼 있었는데, 어느 쪽이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옥녀신들은 형제봉 위에 올라가 빌었더니 옥녀신의 손에 끼었던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지면서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여신의 손에서 떨어진 반지 형상을 띠고 있다는 토지면 오미리 일대는 지금까지도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명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림같은 계단식 논이 펼쳐진 중대마을

문수리의 첫 번째 마을인 상죽을 지나면 오른편으로 계단식 논이 그림같이 펼쳐진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가 중대마을이다. 이 곳엔 아직도 초가집과 샛집이 남아 있다. 조광래 씨(64세)네 집이 바로 그 집인데, 본체는 초가이고 ‘까대기’(행랑채의 사투리)는 샛집으로 되어 있다. 조씨는 원래 오미리 하죽에 살지만, 중대에 밤밭과 논밭이 있어 농번기 생활은 주로 중대에 있는 초가집에서 한다.

농번기에만 잠시 머물다 보니 집 관리는 엉망인 편이다. 그러니 초가 이엉인들 성할 리가 없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는 마당에는 토종벌통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다. 조씨에 따르면 70여 통 가량 된다고 한다. 한봉과 더불어 조씨가 짓는 밤농사는 3천평 정도. 한해 70∼80가마 정도 수확을 올린다. 한창 밤을 주울 때는 어두워져서 밤이 안 보일 때까지 줍는다고 한다.


해발 1천 미터에서 채취한 맑은 물, 고로쇠 수액

밤나무와 함께 이 마을에 부를 가져다 준 것은 고로쇠 수액과 토종벌이다. 마을 곳곳에서 노란 꽃을 피우는 산수유나무를 흔히 만날 수는 있지만, 인근의 산동면이나 구례읍처럼 대규모로 재배하지는 않는다. 밤재에 사는 10여 가구 중 대다수의 주민은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것으로 주소득원을 삼는다. 중대마을을 떠나 밤재 마을에 이르자 초입에 거대한 바위 한 채가 버티고 있는 것이 보인다.

'두지바우'라 불리는 이 바위는 곡식을 넣어두는 뒤주처럼 생겼다 하여 '뒤주바위'가 되었다. 이 바위에서 조금 더 올라가다가 오른편으로 보이는 집이 황하성(35세) 이장 집. 황이장은 밤재의 다른 주민들이 그렇듯 오래 전부터 고로쇠 수액 채취에 매달려 왔다. 물론 고로쇠 수액 채취 시기 외에는 토종벌 사육으로 소득원을 삼는다. 고로쇠 수액은 경칩(3월 초순)을 전후해 20여 일 동안 채취하게 되는데, 이 수액은 알칼리성 이온음료로서 위장병과 신경통, 관절염에 효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미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해발 1천 미터나 되는 산중 깊은 곳에서 자라는 고로쇠나무는 지리산과 백운산, 곧 구례에서 채취하는 수액을 최고로 친다. 보통 기온의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적은 곳에서 자란 고로쇠나무에서 물이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 기후 조건상 구례만한 데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 수액의 채취는 나무 밑동에 V자 모양의 상처를 내서 대롱을 끼워 채취하였으나, 최근에는 드릴로 나무의 심층부를 뚫은 다음, 비닐 자루가 달린 주사바늘을 꽂아 얻어낸다.

물맛은 달콤하고 정종 빛이 나며, 냄새가 없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다. 고로쇠 수액 채취 시기가 되면 어떤 이들은 아예 물안주(노가리, 북어포, 오징어 등)를 준비해 와 하루에 한 말 가량을 먹고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또 이 시기에는 예약을 하고 오지 않으면 물구경도 못하고 갈 정도란다. 물값은 한 말에 보통 4만5천 원 가량. 옛날 노고단에서 무예를 닦던 신라의 화랑들도 목이 마를 때에 고로쇠 수액을 받아 마셨다는 이야기도 이 곳에 전해온다.


최고의 품질로 꼽히는 지리산 토종꿀

현재 황이장은 봄에는 고로쇠 수액 채취, 그 외는 한봉 70여 통을 치는 것으로 주소득원을 삼는다. 예부터 고지대에서 생산돼 온 지리산 토종꿀은 각종 야생화와 싸리, 밤나무, 피나무 등의 풍부한 꽃을 먹고 자란 벌 덕택에 최고의 품질로 일컬어져 왔다. 10여 년 전만 해도 지리산 일대의 좋은 밀원지대를 탐하는 양봉업자들이 개량벌을 풀어놓아 토종벌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한봉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지리산 일대에 양봉업자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어 한봉의 피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최근 지리산 인근에서 너도나도 토종벌을 치는 통에 꽃가루 부족으로 설탕을 먹이는 농가가 부쩍 늘어났다. 게다가 서로 경쟁이 붙다 보니 덤핑을 치는 경우도 생겨나 판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지리산 토종꿀의 품질도 이제는 장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주인 없는 집이 되어버린 귀틀집

민박을 겸하는 황이장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남순임 할아버지(88세) 댁을 찾았다. 마을 주민들이 할아버지 댁이 귀틀집이라는 말을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할아버지 댁은 귀틀집의 원형이 온전히 남아 있는 집이었다. 나무굴뚝도 옛날 그대로였고, 부엌에는 연기의 배출을 위해 뚫어놓은 까치구멍이 있으며, 가마솥 위쪽 벽에는 조왕신을 모시는 ‘조왕중발’을 만들어 놓았다. 이남순 할머니(얼마 전 작고)에 따르면, 과거에는 매일같이 정화수를 떠놓았으나,

요즘엔 초하루나 보름에 각각 한번씩 떠놓는다고 한다. 남순임 할아버지가 손수 지었다는 밤재의 귀틀집은 살림채와 사랑채가 서로 맞보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집 지은 솜씨가 예사가 아니었는데, 우리가 만난 산간 귀틀집 중에서는 가장 솜씨있게 지어진 집 같았다. 물론 관리도 잘 돼 있었다. 화장실도 그냥 돌멩이 두 개를 놓아 일을 본 뒤, 재를 뿌려 짚과 섞어서 퇴비로 사용하게끔 만들어놓은 옛날 방식 그대로였다. 이남순 할머니는 과거 이 마을에 들어와 귀틀집을 짓던 때의 기억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무 비서 져와 가지고 쌓고 흙 이겨갖고 날라서 볼르고 손으로 다 볼랐지 그 땐. 내야 흙 띠다 주고 저이는 볼르고, 내가 집 지타가 애 났응게, 작은 아덜이 지금 마흔 슷인가 느인가 그래.”
가는 날이 장날이라 우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오래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두 분은 구례장에 나가려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나서는 중이었다. 할머니는 다리가 아파서 병원에 간다 하고,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이발을 해야겠단다.

두 분이 천천히 집을 걸어나가는 장면은 마치 오래 전 흑백필름을 다시 보는 것처럼 정겨웠다. 그러나 정말로 그것이 흑백필름처럼 우리들 가슴에 남을 줄이야. 우리가 노인 내외를 만나 뵙고 온 지 반 년만에 이남순 할머니는 아주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혼자 남게 된 할아버지도 얼마 후 아들네로 이사를 가 문수리 귀틀집은 이제 주인 없는 집이 되고 말았다.

 
글/ 이용한     
 
 
 
'두지바우'전설 - 하얀 말로 환생한 아들

밤재 입구에 있는 '두지바우'(뒤주바위)는 현재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있는데, 이 바위가 갈라진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두지바우 근처에 늙은 부부가 아들 하나와 함께 살았다. 그런 어느 날 아들이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갑자기 불행을 당한 부부는 아들이 죽은 뒤 이레가 되도록 시체를 땅에 묻지 않았다. 이렛날 부부는 깜박 잠이 들어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낯선 이가 찾아와 배가 고프니 밥을 한술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들 부부는 나그네에게 밥을 차려 주었고, 밥을 먹고 난 나그네는 부부에게 슬퍼하는 연유를 물었다. 외아들이 죽었다고 하자 나그네는 죽은 아들의 시체를 보자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의 무덤을 큰 바위 위에 만드시오. 그러면 저 세상에서 이 아이는 큰 복을 받게 될 것이오."
그리고는 나그네가 사라져버렸다. 꿈에서 깬 노부부는 나그네의 말을 들어 이튿날 두지바우 위에 죽은 아들의 묘를 만들기 시작했다. 바위 위에 아들의 시체를 올려놓고 흙과 잔디를 날라다 무덤을 만들었다. 묘를 다 만들고 부부가 돌아가려는 순간,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틈으로 아들의 무덤이 내려앉으며 푸르스름한 안개가 퍼져 나왔다. 잠시 후 그 안개에 휩싸여 하얀 말 한 마리가 뛰쳐나오는 것이 아닌가. 말은 부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고, 부부는 그 말을 아들로 여겨 데려다가 극진히 길렀다. 두지바우 한 귀퉁이에는 당시 말이 뛰쳐나오며 남긴 발굽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이후 바위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찾아가는 길: 구례에서 토지면까지 군내버스 수시운행(15분소요, 화개방향 버스를 타고 중도 하차) / 택시이용시 7분여 소요된다. 그러나, 문수리 입구인 '운조루'가 있는 오미리 근방에서, 문수리의 윗마을들 까지 걸어오르기에는 상당히 힘이 부치는 길이다. 문수사까지 포장길이 그런대로 잘 나 있으므로 대부분 자가용이나 택시를 타고 오르내린다.(구례군 토지면 문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