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져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지리산과 근대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개화기를 맞이하면서 이 땅에는 당시 세계의 열강들이 앞다퉈 물밀 듯 들어왔고 그들은 그들의 속셈을 달성하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으니 이 땅은 한때 이방인들의 각축장으로 아수라장을 연상케할 정도로 혼란스러움을 겪어야 했다. 반만년 역사 이래로 역사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마다 늘 그래왔듯 지리산에도 개화의 물결이 더 없이 일게됐고 벽안의 외국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지리산의 아름다움은 아마도 가장 한국적인 자연미와 산수미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아 이방인들이 지리산으로 들어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광활한 지리산 가운데서도 외국인들은 등과 등이 이어지면서 비스듬히 누운 지리산의 서북쪽 능선의 아름다움을 일찍 알아본 것이다. 노고단, 이름만 들어도 지리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성지같은 곳, 해발이 1,500m대로 고산지대면서도 오르내리는데 그다지 힘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여름기온이 15∼20도로 퍽 이상적인데다 수량이 풍부하고 공기 맑고 아름다운 곳, 그곳을 피서지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한민족의 정서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광활한 원시성에서 표출되는 신선함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곳으로 지리산 노고단을 지목, 선택한 이방인은 다름아닌 미국·오스트리아의 선교사들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토록 오래도록 지리산과 벗해 오면서도 이곳에 별장을 짓고 휴양을 즐기거나 피서를 해본적이 없었지만 이들은 달랐다. 우리선조들은 지리산을 결코 휴양지나 피서지로 여기기보다 마음의 도량을 넓히고 수양하는 또는 구도의, 득도의 장이나 피안의 세계로 향하는 길목으로 여기며 경와감을 느끼는 곳으로 여겨왔었다. 이들 외국인들이 지리산 노고단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대략 1920년께로 추정된다. 제2차 대전이 터지고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급랭해질 무렵인 1943년 일본이 외국인 재산을 몰수할 때까지 크게 번성한 노고단의 외국인 별장은 울창한 숲속에 요정의 집마냥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번성기에는 50여채의 현대식 석재별장으로 아름답게 조성돼 테니스장, 수영장, 벽난로까지 만들어진 초호화판 별장이었다. 이무렵 국내 거주외국인 선교사는 물론이고 상해, 일본등지의 외국인 선교사들까지 이곳별장을 이용했다 한다. 화엄사에서 한국인 일꾼들이 지게로 지고온 수많은 석재를 이용, 육중한 석재 별장을 짓고 실내에는 호화스런 장식과 벽난로로 단장해 분위기를 잡았으며 집집마다 수원(水源)을 찾아 샤워까지 즐겼다 한다. 노고단의 외국인 별장은 그러나 1943년 일본이 외국인 재산을 몰수하면서부터 황페화 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을 추방한 일본은 이들 별장을 적산가옥으로 정리해 경매에 붙여 처분했다. 그 후 별장은 인근 부호들의 별장으로 바뀌게 됐다.

노고단의 그것은 다시 대동아 전쟁과 여수·순천반란 사건, 빨치산, 한국전쟁 등의 역사적인 세파를 거치게 되면서 황폐화돼 앙상한 건물 뼈대만 남게된다. 지금의 노고단에 남아있는 별장 잔해들은 당시의 별장규모 형태 등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데 볼때마다 착잡한 마음이다. 근세들어 지리산이 조국과 더불어 겪었던 아픔의 잔해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리산에 평화가 깃들고 사람들이 지리산을 다시 찾을 무렵인 57년 외국인 선교사들은 노고단에서 움막을 치고 허물어진 별장을 복원하려했으나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오염되면서 별장을 옮기게 된다.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곳을 찾아나선 끝에 고산지대면서도 양택의 조건을 고루 갖춘 왕시루봉을 발견했다. 노고단과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산수미를 마음껏 맛볼 수 있는 곳, 그곳을 별장지로 삼았던 것이다. 멀리 다도해의 장관과 섬진강의 굽이들, 그리고 구례들녘의 풍성함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왕시루봉의 기슭은 그 당시만 해도 우리에게 조차 생소한 이방지대로 남아 있었는데 이들이 먼저 그 아름다움을 찾아낸 것이다. 왕시루봉시대를 맞이한 지리산이 외국인 별장은 개인별장 10여채와 테니스 코트 2면, 간이 풀장, 탁구장이 있는 교회당, 창고등으로 옛 노고단 시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규모가 축소됐다. 왕시루봉정상 7∼8부의 억새능선 오른쪽 문수리 계곡 방면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위치한 이곳의 외인별장은 울창한 숲속에 감춰진 듯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어 퍽 아늑하고 한가로운 느낌을 준다. 1962년부터 구례 사람이 관리해오고 있는데 지금은 건물이 낡아 있으나 해마다 여름철이면 외국인 가족들이 피서차 이곳을 찾아 여름나기를 하기도 할 정도로 관리가 잘 되고 있다.

이 곳은 구례군 토지면에서 왕시루봉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를 따라 가다보면 정상 못미쳐 억새능선 왼쪽으로 울창한 숲속으로 향해 열려있는 길을 따라가면 나오는데 토지면 소재지에서 대략 2시간∼2시간30분이 걸린다. 여름철 이외에 연중 대부분 사용되지 않아 늘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탓에 을씨년스런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는 왕시루봉의 외국인 별장을 찾을 때만다 마음한 구석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음을 느낀다. 가을 억새의 장관과 어우러진 숲 속의 요정이 살것만 같은 이곳 외국인 별장이 주는 알 듯 말듯한 분위기도 지리산의 색다른 운치라면 색다른 운치이다.
찾아가는 길은 하동에서 구례읍으로 향하는 국도를 따라가면 구례군 토지면이 나오는데 면소재지에서 오른쪽으로 가면된다. 구산저수지 부근까지 갈수 있으며 버스편을 이용할 경우 토지면 소재지에서 내려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