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는 수천년 부터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오르고 내렸다. 신라 말기 고운 최지원이 지리산 속에서 신선처럼 살다간 경우가 있는가 하면 고려무신 정권기 모든 관직을 버리고 명산을 방랑하며 살다간 해좌칠현(海左七賢)등등과 조선시대 영남사림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인묵객, 선비들이 지리산을 다녀갔다. 그리고 오늘날 끊임없는 등산객들이 지리산을 찾아 누비고 있으며 이는 지리산과 인류가 없어지는 그날까지 게속 될 것이다.
지리산은 위대한 대자연이며 인간과의 불가분의 인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찾고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놓은 이가 많다. 그 가운데 고운 최지원은 그의 지리산에서의 삶을 지리산에 고스란히 새겨둔 반면 15∼16세기에 지리산 탐방에 나섰던 영남 사람들은 그들이 나섰던 영남 사림들은 그들이 체험하고 느긴 바를 비교적 소상하게 기행문 형태의 글로 후손에 전해주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지리산을 찾아 그들의 행적을 남긴 시기의 특징은 현실 정치에 환멸 또는 저항하다 은둔하는 마음으로 산을 찾아 당시의 시대상을 통단하거나 안타까워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리산이 당시 선비들의 현실도피적 사상과 함께 학문적 완성의 시도, 백성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애민·애국사상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관심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특히 15∼16세기께 지리산을 유람하고 난 후 "두류록" "속 두류록"등 두류산 기행문등에 기록된 내용들을 통해 이러한 사실에 접근해 본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일로 여겨진다.
그리고 당시 가장 많은 유림들이 대거 지리산을 찾아 나섰던 시대적 배경과 이같은 움직임이 후세에 기친 영향을 되새겨보면서 지리산 산행을 시도해본다면 더할 나위없이 뜻깊은 산행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물며 선조들의 유람길을 따라 그 길 그대로 답사를 할 수 있다면 또한 의미심장한 일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에 이 글에서는 15∼16세기께,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5백여년 전 지리산을 유람하고 난 뒤 선조들이 남긴 글들을 통해 지리산과 우리민족의 사상·학문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5백여년 전 지리산을 답사하고 그 느낌을 기행문 형식으로 남긴 이들이 많으나 여기서는 김종직의 "유두류록", 김일손의 "속두류록", 이륙의 "두류록"을 중심으로 접근해 본다.
영남유학의 사표로 숱한 인재를 배출한 김종직, 당해 최고의 문장가이며 강직한 사관으로 평가됐던 김일손, 왕이 아홉번 불러도 출사하지 않고 오직 학문증진과 후학 양성에 생애를 다한 조식, 그리고 명문때가 출신으로 3년여간 지리산에 파묻혀 독서에 전념한 뒤 대사헌벼슬에 오르기까지 순탄한 벼슬살이를 해온 이륙. 이들은 공통적으로 지리산 줄기를 중심으로 찬란한 선비문화, 특히 영남선비문화를 꽃피운 주인공들이다. 당시 두류산 유람록 출현에 기폭제 역할을 한 인물은 당연 점필재, 김종직이다.

정몽주, 길재등의 학풍을 계승, 영남사림파의 종장으로 칭송받던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472년(당시 42세) 8월14일부터 19일까지 6일 동안 그의 제자 유호인, 한인효, 임대공, 조위등과 지리산 탐승에 나섰다. 함양관청에서 제자등과 함께 지리산을 향했던 김종직 일행은 말방울을 울리며 등구마천의 벽송사, 신라 화랑의 기상이 살아있던 영랑대, 하봉,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당도했다. 천왕봉의 성모사와 성모사와 향적사를 답사하고는 "...혼돈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휘말리지 말 것이다...."라고 일행들에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의 선비정신을 일깨우기도 한 김종직은 다시 세석평원으로 가 영신사등을 둘러보고 하산했다.
"유두류록"에서 김종직은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서의 조망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천왕봉에 서서 발아래 굽어보이는 세상상의 이치를 깨닳은 듯 그는 그후 엄청난 사회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까지 백성과 나라를 위한 처연한 삶을 계속해오며 영남사림의 대부로 숱한 인재를 배출해냈다.

지리산에서 은둔의 비장함을 안고 현실 정치에 맞대응할 각오를 굳히기는 김종직에 이어 김일손도 마찬가지였다. 1489년 "속두류록"에 남긴 김일손은 김종직에게서 큰 교화를이비고 진주교수로 부임해있다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26세 때에 정여창과 함께 두류산 유람에 나선다. 당시 경상우도 학맥의 정신적, 사상적 지주였던 김일손, 정여창 일행은 진주를 떠나 함양으로 갔다가 다시 산청 경호강을 따라 단성을 거쳐 지금은 사라진 대찰 단속사를 탐방하고 법계사를 지나 천왕봉에 당도한다.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김일손은 백성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당시 시대적으로 수동적 이었던 불교문황의 실태를 한치 빠짐없이 세심하게 살펴보았음을 알수 있다. 천왕봉에서 김일손은 삼한시대 이래로 수많은 왕조가 명멸해오면서 서로 다투어 이 땅에 뼈를 묻은 사연들을 회상하며
...한없이 망망하고 아지랑이 가득한 속에 슬프고 즐겁고 근심되고 기쁜 일등 만가지로 고르지 못함이 있음을 ...이라고 그 감흥을 적었다. 천왕봉에서 김일손 일행은 향적사, 의신사, 신흥사, 쌍계사, 악양을 거쳐 하산하는데 주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산행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지리산에서 은거, 독서 정신한 뒤 벼슬을 한 이륙은 1461년께 쓴 "두류록"에서 주로 천황봉과 법계사 주변의 불교문화, 그리고 향적사, 쌍계사 등등 사찰을 중점적으로 적고 있는데 그가 지리산 사찰에서 학문에 정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1백여년 후, 경상우도 지리산을 중심으로 뚜렷한 학맥을 형성한 남명 조식은 그의 만년에 지리산 기행문인 "유두류록"을 남긴다. 퇴계 이황이 태백산과 소백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의 퇴계학맥을 형성한데 비해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명학맥을 형성, 그 학문의 근원이 된 두류산을 답사하고 글을 남기게 된 것이다.
경상우도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김종직의 문인인 김일손, 정여창등 선배학자들의 사상을 계승, 학문으로 결집한 그는 두류산 산사에서 독서를 하면서 두류산과 인연을 맺었고 10여 차례나 두류산을 유람했다. 평소 시문 짓기를 즐겨하지 않았던 그가 4천여자에 이르는 장편 유람록을 남기고 있음은 중요한 의미를가진다고 볼 수 있다. 58세 되던 해 4월11일에서 26일까지 두류산을 유람한 그는 40여명에 달하는 벗들과 동행하는데 합천에서 사천만과 섬진강, 쌍계사, 악양, 청학동등을 거쳐 합천으로 돌아왔다.

조식은 그의 유람여정을 한유한, 정여창등 선배 유학자들의 유적을 살펴보는데 큰 비중을 두어 그의 학문적 근원을 엿볼 수 있다. 이는 15∼16세기 당시 두류산을 유람하고 글을 만긴 인물들이 학문적, 사상적으로 긴밀한 영향을 맞고 있음을 알 수 있는대목이다. 여기서 당시 선조들이 지리산을 대거 유람하면서 공통적으로 인식한 정신세계는, 산수는 단순히 아름다움의 대상으로서만의 산수가 아니라 역사회고를 통한 자아성찰과 자아각성의 현장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맨 마지막으로 "유두류록"을 쓴 조식은 네차례에 걸친 사화로 현인들이 현인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도리어 위정자에게 목숨을 잃은 현실을 안타까워한 대목에서 당시 두류산을 유람한 인물들의 지조와 애민사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사림들이 두류산을 유람하면서 본 산수는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백성들의 생활과 괴리돼 사치를 즐기는 위정자를 비판했는가 하면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사찰 확장에만 주력하면서 중생구제에 소홀한 승려를 비판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산수는 심성과 학문의 수양 장소였다는 사실이다. 산의 웅장함과 거침없는 물길을 보며 심성과 학문 수양을 통해 경세의지를 함양했다. 한정된 생활공간을 벗어나 확대된 공간(자연)에서 기상을 기르는 곳이 지리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상은 조식의 경의사상으로 형성돼 궁극적으로는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확고한 정신 세계를 가질 수 있었던 근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선조들의 두류산 기행록을 다시금 되새겨 보고 찾아나서는 자세를 한번쯤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