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택리지[擇里志]와 지리산의 땅


이중환은 실학자 이익(李瀷)의 집안이면서 그의 문인이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올라 사화에 휘말리면서 1725년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난 탓인지 전국을 방랑하며 세상에 관여하는 것을 부질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 탓인지 실사구시의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사람이 몰리는 저자거리나 관아가 가까운 곳을 살만한 곳으로 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살만한 곳이라고 보기로 든 곳들은 오히려 숨어살만한 곳들이다.
다른 '감여'의 책들보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주목하는 것은 구례 구만들에 자리잡은 운조루 주인 유이주의 처지가 이중환과 비슷했으면서 바로 이중환보다 1세대 뒤늦게 태어난 사람이고 이중환이 가장 살만한 곳의 하나로 보기를 든 구례에 주목한 흔적이 보이기 까닭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통해 구례 구만평의 지리적인 장점을 살펴 보기로 한다.

<남원부 동남에 위치한 성원(星園)은 산수의 경치가 대단히 좋고 최씨가 대를 이어 산다. 그 남쪽은 구례현(求禮縣)이다. 구례 서쪽 봉동(鳳洞)에는 샘과 들의 경치가 좋은 곳이 있다. 그 동쪽에는 화엄사가 연곡의 명승지가 있고 남쪽에 구만촌(九灣村)이 있다.
임실에서 구례에 이르는 강 연안의 상하류에는 이름난 곳과 경치 좋은 곳과 큰 촌락이 많다. 오직 구만만은 시냇물가에 임하여 강산과 토지가 훌륭하며 작은 배와 어염의 이익도 있어 「가장 살만한 곳」이다.
남원과 구례는 다 지리산 서쪽에 자리잡아 강 서쪽 세읍과 함께 그 전에는 모두 장기(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가 있어 악토라 했으나 근자에 와서 다소 맑고 깨끗해졌다고 한다. 전라 일대는 우리나라의 가장 남쪽에 있고 지방산물이 넉넉하다. 산악에 있는 고을은 시내로써 물을 대서 흉년이 적고 수확이 많으며 바닷가 고을들은 둑으로 물을 댄다. 어진자가 살면서 그 부유한 업을 인연 삼아 예양(禮讓)과 문행(文行)을 가르치게 되면 또한 살지 못할 땅은 아니된다. 이곳도 한번쯤은 마땅히 정기가 모여서 훌륭한 인물을 배태할 것이다. 지금은 땅이 멀고 풍속이 다르므로 살 곳이 못된다.>
(팔도총론 전라도편)


다음은 이중환이 말한 '복거총론'에서 구만들을 이해하는데 도움되는 대목을 뽑아 본다.

<지리(地理)는 첫째 물 빠져나가는 수구(水口)를 보고 다음에 들의 형세와 산 토색 수리 조산 조수를 보아야 한다. 수구가 이즈러지고 성글고 텅비고 넓은 곳이면 비록 좋은 토지와 큰 집이 있다 하더라도 대개는 다음 세대까지 잇지 못하고 망한다. 그러므로 수구가 잠기고 안쪽이 탁 터진 들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산속에서는 이런 곳이 얻기 쉬우나 들 가운데서 이런 짜임새 있는 것은 얻기 어려우니 반드시 물이 거슬러 된 사격(砂格)이라야 한다.
높은 산이나 그늘진 언덕을 가릴 것도 없이 물이 힘있게 거슬러 흘러 판국(版國)을 가로 막으면 좋다. 한 겹이라도 좋지만 세겹, 다섯 겹으로 감싸지면 더욱 좋다. 이런 곳이라야 굳건하게 오래오래 세대를 이어 갈 수 있는 터가 된다.

생리(生利)는 위로는 조상과 부모를 받들고 아래로는 처자와 노비를 거두어야 할 재리(財利)를 거두어야 할 만한 터자리어야 한다. 그러므로 땅이 비옥해야 하고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거나 통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름진 땅은 오직 전라도의 남원과 구례, 경상도의 성주와 진주 등지이다.
벼 한말을 심어서 가장 많이 나는 곳은 140말을 추수할 수 있고 다음으로 100말, 가장 적게 나도 80말을 수확할 수 있는 곳이나 다른 고을들은 그러하지 못하다.
인심(人心)은 그 땅의 풍속을 보는 것이다. 풍속이 착한 곳을 고르지 않은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맹자의어머니가 집을 세 번 옮긴것도 다 이 이치에 따름이다.

대개 사대부가 살고 있는 곳은 인심이 무너지고 상하지 않는 곳이 없다. 당파를 만들어 유객을 거두어 들이며 권세를 부려서 평민을 침해한다. 이미 자신의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면서 남이 자기평함을 싫어한다. 모두 홀로 한 지방에서 재패하기를 좋아한다. 당색이 다르면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마을과 마을이 서로 비방하고 욕한다. 그러므로 오히려 사대부가 없는 곳을 택하여 문을 닫고 교류도 끊고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면 비록 농부가 되고 공인이 되고 장사꾼이 되더라도 즐거움을 그 가운데서 찾는다면 인심은 좋고 나쁨을 가릴 것이 없다고 하겠다.
지리산(智異山)은 남해가운데 있고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이다. 그래서 일명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 금강산을 봉래(逢萊)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고 한라산을 영주라하는 이른바 삼신산(三神山)이다.

「지지」 (地誌)에는 지리산을 병란과 재화, 생사를 맡아 다스리는 태을성신(太乙星神)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한다. 계곡이 서리어 깊고 크며 땅 성질이 또한 두툼하고 기름지어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적당하다. 산속에는 백 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은데, 밖은 좁고 안쪽은 넓어서 왕왕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곳이 있어 세금을 내지 아니하는 수가 있다. 땅이 남해(南海)에 가깝고, 기후가 온난하여 산속에 대나무가 많고, 또 감과 밤도 대단히 많아서 가꾸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열고 저절로 떨어진다. 높은 봉우리 위에 기장과 조를 뿌려도 무성하지 않는 곳이 없다. 평지의 밭에도 거의 심을 수 있으므로 산속의 촌거(村居)는 승사(僧寺)와 섞이어 산다. 스님이나 속인이나 대나무를 꺾고, 감과 밤을 주워서 살아 노력하지 않고도 생리(生利)를 얻을 수 있다. 농부와 공인들도 역시 그리 노력을 하지 않아도 모두 풍족하다. 이런 까닭으로 온 산이 풍년과 흉년으로 모르고 지내므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산 남쪽에 화개동(花開洞) 악양동(岳陽洞)이 있는데, 모두 사람이 살고 산수가 대단히 아름답다. 고려 중엽에 한유한(韓惟漢)은 이자겸(李資謙)의 횡포가 심함을 보고 장차 화가 일어날 것을 알고서, 관직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악양동에 숨어 살았다. 조정에서는 그를 찾아 벼슬을 시키려고 불렀으나, 유한은 도망해서 숨고 끝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 알지 못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신선이 되어 갔다고 한다.

서쪽에는 화엄사(華嚴寺),연곡사(燕谷寺),쌍계사(雙溪寺)가 있다. 이 절에는 신라(新羅)때의 사람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의 화상이 있으며, 시냇가 석벽에는 고운의 큰 글자가 많이 새겨져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운이 도를 얻어서, 지금도 가야산(伽倻山), 지리산(智異山) 두 산 사이를 왕래한다고 한다. 선조 신묘년(辛卯年?1619)간에 절 스님이 바위 사이에서 한 조각 종이를 주웠는데, 글귀 한 수가 있었다.


동국의 화개동은 병속의 별천지라네
선인이 옥베개를 밀어 깨어보니
이 몸이 이 세상에서
홀연히 천년이 지났도다.
(東國花開洞 中別有天 仙人推玉枕 身世숙千年.)


라고 하였다. 그 글자 획이 새로운 듯하고, 그 글자 쓰는 법이 곧 세상에 전해 내려오고있는 고운의 필적과 같았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기를 만수동(萬壽洞)과 청학동(靑鶴洞)이 있다고 한다. 만수동은 즉 오늘날의 구품대(九品臺)요, 청학동은 즉 오늘날의 매계(梅溪)로서, 근래에 비로소 조금씩 사람이 통행하는 흔적이 보인다. 산북쪽은 모두 함양(咸陽)땅인데, 이곳에 있는 영원동(영원동.지리산선암봉북쪽),군자사(君子寺),유점촌(鍮店村)은 남사고(南師古)가 복지(福地)라고도 말하였다.


또, 벽소운동(碧 雲洞),추성동(楸城洞)도 있어 다같이 명승지다. 지리산 이북의 산골짜기 물이 합하여, 임천(臨川,지리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함안 남쪽 남강으로 흘러든다)이 되고, 용유담(龍游潭)이 되어 군(郡) 남쪽에 있는 엄천(嚴川,임천하류)에 이르는데 시내를 따라 상류와 하류의 경치가 모두 지극히 기이하다.
그러나 땅이 너무 깊고 막혀, 촌(村)에는 망하여 온 유민(流民)들이 많고, 때때로 도적이 나오기도 한다. 또 온산에 귀신을 모시는 사당이 많아서, 매년 봄?가을이 되면 사방 이웃 무당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기도를 올린다. 그럴 때 남녀가 드러난 곳에서 서로 섞이기도 하고, 술과 고기의 더러운 냄새가 낭자하여 가장 불결한 곳이 된다. 크고 작은 산맥은 비록 서남쪽으로 뻗었으나 섬진강(蟾津江) 상류에서 국한되었다. 이곳이 물과 샘이 남장(嵐 )을 많이 띄어 온 산이 모두 밝은 기운이 적음은 이 산의 결점이다.

속담에 '시내곁에서 사는 것은 강가에서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바다가에 사는 것만 못하다'고 한다. 이는 재화와 어염을 취할 수 있는 것을 말함이지 바람이 많은 바닷가에 살면 얼굴이 검기 쉽고 각기, 수종, 장학등 병이 많다. 샘물도 귀하고 땅도 소금기가 있고 탁한 조수 때문에 맑은 운치가 없다. 시내곁에 살면 평온한 아름다움과 깨끗한 경치가 있고 농사때 물대기가 좋아서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시냇가에 榮?것만 못하다'고도 한다. 그렇더라도 시냇가에 사는 것은 반드시 고개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야 한다. 그래야만 평시나 난세에 오래 살기가 좋다.

시냇가의 살만한 곳으로 영남 예안의 도산(陶山)과 안동의 하회(河回)가 으뜸이다. 고개를 떠나서 들가운데 내려앉은 시냇마을은 이루 다 손 꼽을 수가 없다. 공주의 갑천(甲川)이 첫째이고 전주의 율담(栗潭)이 둘째이며 청주의 작천(鵲川)이 세재이고 선산의 감천(甘川)이 네재이며 구례의 구만(九灣)이 다섯째이다.

본디 지리산은 동쪽에는 지맥(支脈)이 있고 서쪽으로는 지맥이 없으나 오직 홀로 한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서 구만에 닿아 끊어진다. 구만은 잔잔한 물이 굽이쳐 돌고 강 너머에는 오봉산(五峰山)이 남쪽에서 조회한다. 두 도 사이에 끼어서 재화를 쌓으며 나르는 곳이 되어 넓은 들이 모두 비옥하다. 별은 드물고 달밝은 밤에 강위의 작은 배는 사람은 없어도 스스로 양쪽 기슭을 왔다갔다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오봉산에 선인이 있어 지리산에 왕래하고 있어 그렇다고 한다.

대개 구만한 마을을 모든 계촌(溪村)과 비교하면 생리가 더욱 넉넉하다. 다만 남해에 가까워서 물과 흙(水土)이 이북의 마을보다 못하다. 이 다섯 시냇마을은 지리와 생기가 모두 극히 아름다워서, 도산,하회에 비하면 더욱 훌륭하나 영(嶺)에서 떨어진 것이 약간 멀기 때문에 다만 평상시에는 세거(世居)를 감당할 수 있으나, 전쟁을 피하는 데는 불리하다. 이 점이 황수(潢水)북쪽의 여러 마을에 미치지 못한다.>

이처럼, 이중환은 국내에서 살만한 곳을 자연의 지세와 생리 등을 따져 밝히면서 구례의 구만들이야말로 산골짜기가 아니면서 산골짜기 마을 못지 않게 살만한 복지(福地)라고 말하였다.

 
 
 
택리지[擇里志] - 1751년(영조 27)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1690~1756)이 저술한 지리서.

이외의 대표적인 지리서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있다.
참고삼아서 자주 인용되는 부분을 발췌하자면, <동국여지승람>진주목(晉州牧)조에,
'지리산(智異山)은 산세가 높고 웅거하여 수백 리에 웅거(雄據)하였으니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유(流)자는 유(留)자로 쓰는 것이 옳다 한다. 또 지리(地理)라고 이름하고 또 방장(方丈)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杜甫)의 시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의 주(注)'와 통감(通監) 집람(輯覽)에서 '방장이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 한 것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 산을 남악(南岳)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 둘레에는 십 주(州)가 있는데 북쪽은 함양이요. 동남쪽은 진주요. 서쪽은 남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는 태을(太乙: 北極神)이 그 위에 거하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이 거하는 곳이기도 하다' 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