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동편제)
 [흥보가]제비노정기 - 강도근(북:이성근)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은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인 가왕 송흥록 선생이 태어난 곳이며 명창 박초월의 소리의 고향이다. 예부터 운봉은 우리나라 3대악성의 하나인 옥보고가 거문고를 크게 발전 시킨곳(운상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악계의 거성으로 우뚝솟은 송흥록,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 김정문, 이화중선, 장재백, 박초월, 배설향, 강도근, 안숙선, 강정숙, 전인삼등과 대금의 명인 강백천, 가야금병창의 명인 강순영, 오갑순, 강정렬등 수많은 명창들이 지리산 자락의 아늘한 고원인 이곳에서 소리를 빚어내었다.

동편제 : 섬진강 동쪽 지역인 남원·순창·곡성·구례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서, 가왕으로 일컬어지는 운봉 출신의 송흥록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우조(씩씩한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감정을 가능한 절제하며, 장단은 '대마디 대장단'을 사용하여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발성은 통성을 사용하여 엄하게 하며, 구절 끝마침을 되게 끊어낸다.
서편제 : 섬진강 서쪽 지역인 광주·나주·담양·화순·보성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 순창 출신이며 보성에서 말년을 보낸 박유전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계면조(슬픈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며, 발성의 기교를 중시하여 다양한 기교를 부린다. 소리가 늘어지는 특징을 지니며, 장단의 운용 면에서는 엇부침이라하여, 매우 기교적인 리듬을 구사한다. 또한 발림(육체적 표현. 동작)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
 
 
동편제의 창시자 송흥록 (1780년경(정조)∼1860년경(순조), 조선후기 판소리의 명창)
 
송흥록(宋興祿)은 민속음악 가운데 가장 느린 진양조를 판소리에 응용, 판소리의 표현영역을 확대시키는 등 다양한 음악 기교를 사용함으로써 극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판소리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특히 '춘향가'의 옥중가 中 귀곡성(귀신 울음소리)은 그가 창작한 독창적인 판소리 창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송흥록 선생으로부터 출발된 동편제는 형의 고수로 지내다가 뒤에 형에 버금가는 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은 아우 송광록과 손자 송만갑이 대를 이어온 이후 계층과 지역을 초월한 광범위한 애호를 받는 예술로 부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이 죽고 난 후 무덤에서는 '내 소리를 받아가라'는 귀곡성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송흥록 이야기

송흥록(宋興祿)은 정조24년경(1800넌) 전북 남원군 운봉면 비전리에서 태어났다. 송흥록은 어릴 때부터 나이에 비하여 기골이 장대하였고, 재주와 슬기가 출중하였으며 풍채 또한 빼어났다. 송흥록은 6세 때 서당에 다니면서 글공부를 시작하였고, 집으로 돌아오면 부친 송첨지에게 춘향가를 배웠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헤아려 아는 그 재주에 서당훈장은 감탄하고, [네가 양가에 태어났더라면 장차 큰 인물이 될 터인데 아까운 일이다]하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송흥록은 소리공부에 있어서도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나서, 그 성음이 극히 청미한데다가 성량이 또한 풍부하였고 부친이 한두번 선창하면 그대로 방창하였다. 그래서 서당에서는 [신동]이라 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일러 [가무보살(歌舞菩薩)의 시현(示現)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송흥록의 부친 송첨지는 원래 초대 명창 권삼득의 수행고수로서 권삼득과 여러 해동안 기거를 같이하여 왔기 때문에, 권삼득의 소리바디와 너늠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송첨지는 송흥록에게 기대를 걸고 어려서부터 정성껏 소리를 가르쳐 왔던 것이다. 송흥록은 12세 때 백운산으로 들어갔다. 백운산 일대에는 유명한 고찰과 암자가 많았다. 송흥록은 백운산 깊은 곳에 자리한 암자에 거처하는 월광선사(月光禪師)의 도움을 받아 아무 걱정 없이 소리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밥만 먹으면 소리를 계속하였고 밤이면 월광선사에게 글을 배웠다. 송흥록은 입산한 지 5년만에 소리가 무엇인지 터득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월광선사는 말하였다. [이제 글은 내게서 더 배울것이 없다. 소리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할 것이니 명심하고 듣거라]하고, 다음과 같이 설파 하였다.

[네가 부르는 소리, 즉 창은 우주의 삼라만상의 소리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생의 희노애락과 애오욕과 생로병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천파만류의 물이 흘러서 바다에 이르면, 오직 한맛으로 변하는 바닷물이 되는 이치이며 소리 또한 그러함이라. 다시말하면, 만백성의 우주에 충만한 한소리한소리가 합쳐져서 원음인 한맛의 소리가 극치에 이름이라. 그러므로 이 세상 만물의 소리는 너의 연구대상이니 결코 듣고 흘려 버리지 말지니라] 또, 월광선사는 창법의 원리에 대하여 [말과 음의 조화를 이루는 어단성장(語短聲長)의 창법을 알아야 하고 귀성이 낀 소리, 맵시 있는 너름새, 오음과 음향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이른바 득음(得音)을 완전히 구사하며, 사설의 발음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연마하되 소리 밖에 소리가 있고 장단 박에 장단이 있으니, 그 도리를 개달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고 네가 지금 부르는 사설이 너무 조잡하니 무든 가사를 정리하고 이를 집대성하여라] 하였다. 송흥록은 크게 깨우친 바 있어 이때부터 가사를 정리하기 시작 하였다.

먼저 춘향가에 있어서 불합리하고 조화가 이뤄지지 않은 대목은 다시 가다듬고, 너무 잡희에 지나친 곳은 고쳐가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음악적 기교와 정감에 알맞도록 창곡을 근간으로 하여 수정하였다. 사설에 있어서도 거기에 다시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민속적 사설과 한시부의 단편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시창, 가곡, 단가, 농요 등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조잡하고 짜임새 없는 내용은 수정삭제하며 잡희의 구사경지를 완전히 탈피하여 발림, 좌립진퇴, 표현기교의 완전한 극적효과를 나타내는 극창으로서의 춘향가와 흥보가를 완성하였으며, 당시의 고전에서 별주부전, 변강쇠타령, 적벽가 등을 정리하고 이를 집대성 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노력과 적공이 쌓이고 쌓여서 송흥록은 10년만에 득음대성하였다.

그리하여 얻은 목은 마치 하늘을 뚫을 듯하였고, 광활한 지역을 울려 덮을 듯하였다. 그 웅장하고 쾌활한 성량은 과연 신비한 영역에 도달하였다. 이와 같은 지신(至神)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송흥록이 10년을 하루같이 불철주야 심혈을 다하여 절차탁마(切磋琢磨)한 적공이었으며, 또한 월광선사의 보살핌과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광선사는, [이제 너의 소리는 신역에 이르렀다. 네가 세상에 나가면 불세출의 명창이 되리라. 이제 그만 세상으로 돌아가라]하며 다시 당부하기를, [너는 여난의 상이 있으니, 세상에 나가거든 각별히 여색을 조심하여라] 하였다. 이리하여 송흥록이 하산하려던 그 전날 밤의 일이었다. 삼경에 초립동(草笠童) 세 사람이 찾아와서, [영상대감께서 부르시니 지체말고 어서 갑시다.]라고 하여 송흥록은, [어느 영이라고 거역하겠오마는 이꼴을 하고야 어찌 가겠오?]하니 초립동은, [의관일습은 다 마련되어 있으니 염려말고 어서 가기나 합시다.] 하여, 송흥록은 입은 옷 그대로 아무런 의심없이 초립동을 따라 나섰다. 휘황하게 밝은 보름달밤 북쪽으로 능선을 타고 얼마나 갔을까, 멀리 산아래 기슭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당도하였다. 초립동 한사람이 문간방 방문을 열고, [ 이 방에 의관일습이 있으니 갈아입고 나오시오]하였다. 송흥록이 방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초립동의 말대로 의관일습이 놓여 있었다. 송흥록은 헌누더기를 벗고 비단 바지저고리에 버선 행전이며 초록색 도복에다 통영갓에 호박풍잠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안체로 인도되었다.

육간대청 너른 마루에 삼정승 육판서와 만조백관이 금관조복 차림으로 좌정하였고, 수십개의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대낮같이 밝혀 있었다, 상좌의 영의정이 말하기를, [네가 비곡(悲曲)을 잘 부른다 하니, 옥중가를 들어보자] 하였다. 원래 춘향가 중의 옥중가는 옥중비가라고도 하며, 춘향가 전편을 통하여 가장 비통한 대목이다. 애지중지하던 임을 이별하고 주야상사 슬피울며 세월을 보내던 춘향이는 신관사또의 수청들라는 성화에 저사모피하다가, 끝내는 삽십 대 형정맞고 옥에 갇혀 신음하면서 그래도 이몽룡을 이틋이 그리워하는 슬픈노래인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대관들 앞에 나서고 보니 송흥록은 떨리기도 학였으나 흥분과 긴장을 가라앉히고 목을 가다듬고 옥중가를 시작하였다.

애원한성으로 엮어나가는 송흥록의 비사애조에 청중은 측은한 표정으로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송흥록의 소리가 끝나자 영의정은 옷소매로 눈물을 딱고 말한다. [과시 천하의 명창이다. 그러나 귀곡성이 미진하구나. 내가 귀곡성을 가르쳐 줄 터이니 따라 배우라] 귀곡성(鬼哭聲)이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내기 어려운 귀신의 울음소리를 말한다. 영의정이 귀신의 울음소리를 하는데 송흥록은 몸이 오싹하면서 소름이 쭉 끼쳤다. [옳지! 이것이야말로 정말 귀곡성이다.] 송흥록은 탄복하면서 따라 불렀다. 송흥록은 타고난 천재인지라 영의정의 귀곡서응ㄹ 그대로 방창하여 완전히 배워 익혔다. 그날밤 송흥록은 분명히 산해진미의 대접을 받았고, 비단금침 속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고래등같은 기와집과 삼정승 육판서는 간곳이 없고, 황량한 벌판에 다 허무러진 어떤 망령(亡靈)의 옛무덤 속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송흥록은 와싹 소름이 끼치면서 어찌나 무서웠든지 벌떡 일어나서 혼비백산하여 앞만 바라보며 오금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 육십령 - 백운산과 덕유산의 중간지점으로,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짓는 소백산맥의 험한재- 까지 도망쳤는데, 거기서 초부에게 물어물어서 그 암자까지 돌아오는데 3일이 걸렸다고 전하고 있다. 그거야 어찌 되었든간에 송흥록이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그의 명성은 금방 삼남일대에 자자하였다.

어느날 진주 관찰사(觀察使)의 부름을 받고, 그날밤 진추의 촉석루에서 옥중비가를 불렀을 때 수천의 청중은 송흥록의 슬픈소리에 모두 눈물을 흘렸고 귀곡성을 내는 대목에 이르러 창거창래(唱去唱來)의 진경에 들어가자 갑자기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청중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로 전한다. 어찌하였던 송흥록처럼 많은 전설과 신화(神話)를 남긴 명창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송흥록은 무슨 소리고 그저 듣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의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우짖는 바람, 졸졸 흐르는 물소리까지도 무심히 듣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라 하는 것은 무슨 소리이건 다 송흥록에게는 좋은 교재요 연구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한 마리 황소의 기운찬 울음소리를 듣고 [얼씨구! 소리는 저렇게 힘차고 무게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은 그것을 잘 증명하고 남음이 있거니와, 이것은 또 송흥록만의 깨달음으며 터득인 것이다.

이는 물론 월광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영향도 있겠지만, 그러한 공부가 소리를 지르면 성낸 바람과 같이 나무라도 부러뜨리고, 속삭이듯 소리를 낮추면 따스한 봄바람에 꽃을 피우는 불세출의 절창(絶唱)을 낳았다. 사람마다 높은 목이 힘 안 들이면 눅은 청이 어렵고, 눅은 목이 부드러우면 높은 목이 안타까이 달린다. 그보다 즐거운 소리가 능하면 슬픈 곡조가 미치지 못하고, 한스러운 창이 미끄러우면 기꺼운 사설은 좀 부끄러운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송흥록은 어느 소리고 목에 걸려서 어렵거나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상성, 중성, 하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귀신에게 배웠다는 귀곡성은 탈조화(奪造化)하였다고 한다. 대낮에 들어도 머리끝이 쭈빗할텐데 궂은비 오는 어두운 밤에야 귀신의 울음소리는 정말 무서웠으리라.


송흥록을 평하여,
[모든 가사를 집대성한 공로와 기량의 특출한 점으로 보아서 판소리의 중시조라 할 수 있으며, 그의 고매한 인격과 기예의 절륜, 포부의 호대함은 뒷사람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바라]고 하였다. 이것은 후일의 이야기이지만 명창으로서 헌종의 총애를 받았던 모흥갑은 송흥록을 가왕(歌王)으로 떠받치고 스스로 물러간 것만 보더라도 송흥록의 소리와 격조를 헤아리기에 부족은 없을 것이다. 송흥록은 대구감영의 부름을 받고 선화당에서 옥중비가를 불렀다. 그시의 경상감사의 수청기생 맹열은 송흥록의 선풍도골과 소리에 황홀하여 넋을 잃고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얼마 후 맹열은 감사에게 구실을 만들어 짬을 얻고 운봉으로 송흥록을 찾아가 필경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송흥록과 맹열의 부부생활은 결코 평탄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송흥록의 오만한 성격과 맹열의 너무 지나친 시기질투가 서로 배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송흥록은 진주 관찰사의 부름을 받게 되어 맹열과 왕환 20일을 약속하고 떠났는데, 일이 늦어져서 3일 늦게 운봉으로 돌아와 보니맹열은 가출하고 집에 없었다. 송흥록은 식음을 전폐하고 맹열을 찾아다녔다. 맹열이 진주에 가있다는 소문을 듣고 송흥록이 달려가 보니, 맹열은 뜻밖에도 진주병사 이경하의 수청기생이 되어있던 것이다. 맹열은 송흥록이 약속날짜에 돌아오지 않은 것은 필연코 다른 기생과 정을 통하는 것이라고 곡해한 나머지 가출하여 진주로 와서 자청하여 보란 듯이 이병사의 수청이 된 것이다. 송흥록은 상대가 진주병사인지라 어찌할 수 없었다. 맹열은 송흥록이 진주에 와서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병사를 시켜서 송흥록을 불러 들였다. 이병사는, [네가 명창이라지. 어데 수궁가 중에서 토끼 배가르는 대목을 들어보자, 나를 한번 웃기고 울리면 3백냥의 상을 내랠것이나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을 베리라]하고, 을름장을 놨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맹열이가 앙심풀이하려고 이병사를 그렇게 시킨 것임을 송흥록은 짐작하였으나 그렇다고 이병사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송흥록은 이병살을 웃기려고 우스꽝스러운 익살, 재담, 해학 등으로 별의별 짓을 하면서 소리를 하건만, 이병사의 얼굴은 얼어붙은 듯이 차갑기만 하였다. 송흥록은 소리를 하다말고 느닷없이 이병사의 앞으로 와락 달려들어 이병사와 얼굴을 맞대고 [ 아이고 아자씨이! 어째서 웃지 않으시오? 날 죽이고 싶소오?]하고, 농담조로 말한 것이 주효하여 이병사는 그만 방긋 웃고 말았다. [우라저씨가 웃으셨는디 또 어떻게 해야 우실까]하고, 송흥록은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을 애원처절한 성음으로, 어떻게나 슬프게 불렀던지 만좌와 함께 이병사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과연 명창이다]이병사는 탐복하고 3백냥의 상금을 내렸다. 맹열은 이병사에게 송흥록과 전일관계를 솔직하게 고백하였고 이병사의 양해로 두사람은 다시 결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흥록과 사사건건 맞서는 맹열이는 어느날 [간다]하고 봇짐을 싸가지고 나가 버렸다.송흥록은 맹열을 달래서 다시 화합하고 싶였으면서도 그 자부심이 강하고 오만한 성품은 도리어 맹열에 대한 증오와 격분이 그리고 고독의 비애감이 일시에 병발하고 말았다. 사랑하는 맹열과 영이별하게 됨에 그 비통한 감정은 저 유명한 <진양조>의 [단장곡(斷腸曲)]으로 나타났으니,


맹열아 잘가거라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잘가거라

네가가면 정마저 가져가지
몸은가고 정만 남으니
쓸쓸한 빈방안에 외로이 애를태우니
병안될소냐 맹열아 잘가거라


이 비창한 소리를 대문 밖에서 듣고 있던 맹열은 동감의 정을 어쩌지 못하고 다시 들어와서 사죄하고 화해하였는데 이것이 부지부각 중에 자탄가를 부른 것이 우연하게도 <진양조>를 완성하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그후로도 송흥록과 맹열의 불화가 가실 날이 없어, 송흥록은 일찍이 월광선사로부터 [여난의 상이니 여색을 조심하라]는 타이름을 상기하고 맹열과 갈라서고 말았다. 그후로 송흥록은 의정부좌찬성 김병기(1818-1875)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간 것이 철종 10년(1859) 봄이었다. 김병기는 철종의 외척 김씨의 장손으로소 부친 김좌근은 영의정이요 생부 김홍근(김병기는 김홍근의 아들이나, 장자인 김좌근이 아들이 없어 김병기가 김좌근의 양자로 김씨가의 대을 이었음)은 좌의정이며, 김씨일가가 정부요직을 두루 장악하고 있어 그 세도는 하늘에 닿았다. 김병기의 벼슬은 비록 좌찬성이나 그는 국사의 중소대사를 막론하고 삼정승 육판서는 상대하지 않고 직접 국왕만을 상대하였다. 철종은 싫건좋건 김병기의 의사를 꺾어나 비우를 건드리지 못하는 옹주였으므로 실제적으로는 김병기가 최고권자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송흥록은 이러한 김병기의 부름을 받고 서울 교동에 있는 김벙기 저택의 별관에 부인과 같이 기거하였다.

송흥록은 김병기의 주선으로 어전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하였고, 철종은 송흥록에게 정삼품(正三品)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하였는데, 명창으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고 벼슬을 제수받은 것은 모흥갑이 헌종에게 종이품의 동지벼슬이 처음이고 송흥록이 두 번째가 된다. 송흥록은 그 전륜의 기예를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그 명성은 서울은 물론 삼천리 방방곡곡에 진동하였다. 벼슬아치 앙반들의 부름에 응하여 소리를 하게 되면 그 행하(보수)는 천량금이어서, 상경한 지 2년만에 수만금을 벌었다고 한다. 철종 13년(1863) 봄 평소에도 김병기는 종친 흥선군을 미워하였는데, 철종이 병약하고 사자가 없게 되자 김병기는 더욱 흥선군을 학대 구박하였다. 원래 성품이 곧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송흥록인지라,

김병기의 체면 없는 처사를 비방하고 [세불십년이라]하고 야유하며, [종친박대는 신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흥선군을 두둔하고 간하다가 김병기의 노염을 사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송흥록은 함경도로 귀양가게 되었던 것이다. 송흥록은 통정대부의 교지와 그 많은 돈을 그대로 놔두고 보인과 함께 함경도를 향하여 방랑길에 올랐다. 그해 12월, 철종이 사자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니 흥선군의 열 두 살난 둘째 아들이 등극하여 고종임금이 되었고, 생부인 흥선이 이조사상 살아있는 최초이자 마지막인 대원군이 되어서 섭정함에 따라 외척김씨는 일시에 몰락하고 세상이 뒤바뀌고 만 것이다. 이듬해(1864) 흥선대원군은 전날의 송흥록의 은혜를 생각하고 함경 감사에게 사신을 보내어 송흥록을 찾도록 분부하였으나 송흥록이 북청에서 증발하여 버린 뒤였다. 이리하여 송흥록은 일점혈육도 남기지 못하였고, 동생 송광록과 박만순에게 소리를 남겼을 뿐이다.

자료/남원시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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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창 강도근'


그가 입을 열어 소리 풀기도 전에
폭포는 한 세계를 품는다.
저 산자락을 휘어감는
감응의 빛 무늬를 보라.
젖어 떨지 않는 것 없구나.

젖어 떨지 않는 것이 없구나! 애원상성조가 서편제 가락이라면 지리산 만학천봉을 휘어넘는 소리가 동편제다. 강도근은 동편제의 소리꾼. 캄캄한 소리가 떡목, 타고난 소리가 천구성, 이 천구성에 '그늘'이 끼면 수리성이다. 이 소리는 송흥록의 일화처럼 폭포수에 콩 열 말쯤 쏟아부어서야 득음이 가능하고 더늠(째)이 가능하다. 지금 우리 시가 그렇지 않은가? 가락이 없으니 고전화(古傳化)가 되지 않는다. 날볕에 우는 소리는 엄살이고 과장이다. '명창 강도근'을 끌어들임도 의미심장하다. 임방울의 목은 노랑목, 송흥록의 더늠(째)은 귀곡성(鬼哭聲). 그러니 폭포처럼 '한 세계를 품고 큰 시인이 되려면 이승(삶)과 저승(죽음)을 발랑 뒤집을 수 있는 생체험으로 가락을 타야 좋은 시가 될 것 같다.    (글/송수권 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