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한국전쟁과 빨치산

지리산 중심으로 관공서 습격·우익인사 처단 활동, 단독정부 수립 맞선 4.3 항쟁서 빨치산 활동 본격 시작

빨치산은 일제시기부터 있었다. 국내에서는 일제 말기 징병·징용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갔던 젊은이들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적은 규모이며 조직적인 것도 아니었다. 국외에서는 보다 더 조직적이며 많은 규모의 항일빨치산이 만들어졌다. 조선의용군·동북항일연군으로 불리워진 세력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하였고, 때로는 국내진공작전까지 시도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비적'으로 부르며 엄청난 액수의 현상금을 내걸고 정규군을 동원한 대규모토벌작전을 진행하였다.

해방뒤 남한의 빨치산은 1946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10월 친일경찰의 악행과 각종 사회문제 때문에 대구에서 시작된 10월인민항쟁은 전국을 튳쓸었다. 항쟁을 진압한 뒤 미군정과 경찰은 항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을 체포·구속하였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 '야산대'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초보적인 수준이었을 뿐 본격적인 무장항쟁을 전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빨치산의 시작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에 맞선 제주도의 4·3항쟁에서부터였다.

제주 4·3항쟁은 5월 10일 치러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무산시켰고, 이에 대해 미군정은 초토화전술을 대표되는 가혹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내륙의 빨치산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2달여 만에 발생한 여순사건에서 본격화 되었다. 10월 19일 제주도 파병과 군내 좌익제거인 숙군에 반대하여 일어난 여수 주둔 제14연대 병사들의 봉기는 신생 대한민국 체제에 위협이 되었다. 당시 신무기였던 미제 M1 소총으로 무장한 반란군은 정부의 진압군이 여순지역으로 들어오기 전에 인근의 지리산·백운산 등지로 들어갔다. 산으로 들어간 이들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 전부터 도피해있던 남로당 빨치산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조직적인 훈련과 새로운 무기를 갖춘 봉기군의 합류는 미미한 수준의 빨치산에게 흡사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격이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군은 철수계획을 연기하였고, 정부는 경찰이 아닌 군을 동원하는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빨치산의 지도자는 여순봉기를 지휘했던 제14연대 중대장 출신의 김지회·홍순석 등이었다. 그러나 정부군의 지속적이고 강력한 토벌작전의 결과 구빨치(한국전쟁전의 빨치산)가 거의 와해되어 갈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전쟁 초기 부산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지역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북한은 남한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통치를 하였다. 북한식 농지개혁(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비롯한 각종 통치행위가 수행되었다. 과거 빨치산과 인민위원회 출신 세력과 북한에서 파견된 간부들이 인민위원회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로 북한의 인민군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퇴로가 막힌 북한의 정규군, 인민위원회 주도세력, 우익세력의 보복이 두려웠던 사람들이 다시 산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기의 빨치산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기의 빨치산(신빨치)은 이전의 빨치산(구빨치)과는 여러 가지에서 다른 면모를 가졌다. 우선은 그 규모가 대규모적이었다. 구빨치가 대개 열성적인 남로당원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던 반면에 신빨치는 남로당원 뿐만 아니라 북한 정규군 등이 합류하여 그 핵심세력이 확대되었다. 다음으로 그 임무가 뚜렷해졌다. 주전선을 후방에서 교란시키는 임무를 띠게 되었다. 비정규전인 제2전선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그 목적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빨치산과 다른 것은 아니었다. 즉 친일파 처단, 미국과 이승만에 대한 반대, 농지개혁을 비롯한 사회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경기도를 제외한 각도에 빨치산이 생겨났다. 많은 인원과 풍부한 무장력을 갖춘 초기 빨치산은 주변 고을을 해방구로 거느리는 상황이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상황이 시작된 것이다.

전남의 빨치산은 전쟁 초기 조선노동당 전남 도당 위원장이었던 박영발(그는 일제시기부터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던 사람이었다. 일제의 고문으로 다리를 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빨치산의 사령관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신체적 한계 때문에 실제 유격대 총사령부는 김선우 부위원장이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남 도당 총사령부 아래에는 화순·보성유격대, 화순탄광유격대, 나주동부유격대, 영광유격대, 광산유격대, 장흥·광양·장성유격대, 담양유격대 등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광양의 백운산·영광의 불갑산·화순의 백아산 등에 거점을 두고서 군 보급로 습격·주변 마을의 관공서 습격·우익인사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빨치산의 활동은 전쟁을 수행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러므로 미국과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10월에 11사단을 후방에 배치하여 빨치산 토벌작전을 담당케 하였다(1950년 7월 이승만과 맥아더의 각서에 의해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군으로 넘겨져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국군의 무차별적인 토벌의 결과 거창·함평 등에서는 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양민학살사건은 커다란 정치문제가 되어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단이 파견되었다.

1951년 이후 한국전쟁은 휴전선을 중심으로 교착되었고, 후방에서는 빨치산들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빨치산들은 1951년 8월 제2차 6개 도당회의(전남북, 경남북, 충청남북)를 개최하여 이현상을 지도자로 하는 남부군(제5지구당)으로 개편되었다. 이현상의 남부군으로의 조직개편 제안에 대해 전남북도당 위원장이었던 박영발과 방준표는 당위의 원칙을 제시하며 반대하였다. 무장투쟁도 당이 지도해야 한다는 원칙과 중앙당의 명령이 없다는 비판이었다. 결국 전남북을 제외한 빨치산들은 지리산의 남부군으로 개편되었다.

한편 빨치산 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유엔군사령부에서는 당시 전방에 있던 수도사단과 8사단을 토벌작전에 동원하였다.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투사령부가 후방에 수립되었다. 백야사(백선엽야전전투사령부)는 이전의 부대와는 달리 탁월한 전투역량을 바탕으로 군경합동의 작전을 51년 11월부터 52년 3월까지 전개하였다. 당시 남원에 사령부를 설치한 백야사는 이전의 토벌과는 달리 군경합동으로 한 겨울에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산에 있던 빨치산들은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에 맞아 죽게' 되었다. 백야사의 토벌작전은 빨치산의 역량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핵심세력은 토벌을 피하면서 그 역량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그외 많은 역량의 손실을 가져왔다. 그 뒤에도 빨치산은 그 핵심세력이 건재했기 때문에 그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52년 7월에 다시 국군 제1사단을 동원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정부군의 지속적인 토벌과 산에서의 고립으로 빨치산 내부에서는 더 이상의 입산투쟁이 무력함을 깨닫게 되었다. 1952년 5월 15일 결정으로 전남 도당 박영발 위원장은 "인민과 떨어져 있는 투쟁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인민 속으로 들어가서 합류해서 지항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하면서 지하당 구축사업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미 반공체제가 강하게 구축된 현실에서 이들의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정부는 전향공작과 토벌작전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까지 계속되었던 빨치산의 역사는 1955년, 6년경에 산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글/박동찬.  [한국전쟁과 빨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