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의 논배미는 거의 다 계단식 논이었다. 경작지라고 해야 들판보다 비탈이 더 많은데 논에는 물을 댈 수 있어야만 하니 천수답이 아니라도 위에서부터 물을 대야 고루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계단식 논의 굽이진 논배미는 조상들의 슬기와 멋이 한껏 배어 있는 우리 땅의 가장 아름답고 전형적인 표정으로 되어 있다.
 
 

피아골은 지리산 수백 골짜기 중에서도 계류가 크고 깊어서 연곡천이라는 이름을 따로 갖고 있으며, 골짜기 위로 트인 하늘은 넓고 밝아 어느 계곡보다도 기상이 호방한데 그 골짜기로 기운 경사면을 계단식 논으로 쌓아올린 신기로움과 아름다움은 차라리 눈물겨운 것이기도 하다.

옛날 우리의 논배미는 거의 다 계단식 논이었다. 경작지라고 해야 들판보다 비탈이 더 많은데 논에는 물을 댈 수 있어야만 하니 천수답이 아니라도 위에서부터 물을 대야 고루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계단식 논의 굽이진 논배미는 조상들의 슬기와 멋이 한껏 배어 있는 우리 땅의 가장 아름답고 전형적인 표정으로 되어 있다. 경지정리가 되면서 계단식 논은 우리 주위에서 자꾸 사라져 가고 있지만 아직도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우리네 향토적 서정의 징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카톨릭대 안병욱 교수는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 셋'을 논하면서 그중 하나로 이 논배미를 꼽고 이렇게 말했다.

 
 
원만하게 굴곡진 먼 들판의 모습은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린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예술품, 바로 그것이다.... 어디도 모나지 않은 논배미는 순한 농군의 심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 논은 절대로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우리 선인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따라 물결 같은 논두렁을 그리면서 중심 바닥만은 공평을 잃지 않은 것이다. 나는 들녘을 바라보면서 생존의 고단함을 무심히 달랬고 거기 넘실대는 나락을 보면서 생의 의지를 돋우었을 농민을 생각해본다.

그런 계단식 논배미의 마지막 보루가 여기 피아골이다. 가파르게 계곡으로 내리지르는 비탈을 깎아 논을 만들자니 비탈마다 보통은 몇 십 계단의 논으로 석축을 쌓았는데 논배미가 작은 것은 겨우 열 평 남짓되는 것도 있고, 높게 쌓은 석축은 사람 키 두
길이나 되는 것도 있고 또 봇물을 끌어댄 물길이 '실하게 두마장은 되는것'도있다. 그리고 숲속으로 돌아간 논두렁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비탈엔 거의 100층의 논배미가 계단을 이루고 있다. 정말로 장관이다.

피아골 계단식 논은 피아골에서 벌을 치면서 4년간 글을 쓰신 송기숙 선생이 철저하게 연구해서 그 미세한 사실들을 소설 [녹두장군] 제5권 '공중배미'편에 세세하게 묘사해 놓았는데, 어느 논두렁 석축도 안으로 기운 것이 없고 모두 한 뼘이라도 더 넓히려고 바짝 곧추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논배미는 생긴 모양에 따라 삿갓배미, 치마배미, 항아리배미 같은 별명이 붙은바 어떤 논은 아랫논에 기댄 것이 6분의 1도 안되니 차라리 공중배미라고 할 것이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피아골 계단식 논은 농민들의 땅에 대한 무서운 사랑과 집념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옛 속담에 '자식 죽는 것은 보아도 곡식 타는 것은 못 본다'는 그런 농군의 정성이 피아골 계단식 논을 가능케 한 것이다.
피아골의 계단식 논, 그것은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우리 조상들이 장기간의 세월 속에 이룩한 집체창작이며,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고 자연과 예술이 하나됨을 보여주는 달인들의 명작인 것이다. 계단식 논이 살아 있는 한 피아골은 살아 있고, 그것이 살아 있을 때 피아골은 살아 있다.

   
글/ 유홍준       

 
   
 
찾아가는길: 지리산 피아골 주변에 있다. 섬진강에서 피아골로 접어들면서 내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특히 피아골의 계단식 논은 매우 가파르고 좁은 논배미가 많다.
구례에서 피아골(토지동,직전)행 버스가 자주 있으므로 이용한다. 또한, 피아골 매표소 전방에서 통꼭봉 아래 농평마을 시골길로 접어들면 고지대 계단식 논을 접할 수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