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5년만 버텨보자"며
86년 10월 치밭목에 올라왔다. 바늘 가는데 실 간다고 신혼의 단꿈에 부푼 부인(정연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32세 한창의 나이에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모두들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거들떠 보지 않았고, 그만큼 산꾼의 눈에 내버려두기에
안타까운 곳이었습니다."
산장 관리인으로 첫번째 맞는 겨울은 추웠다. 한겨울 최저 기온이영하 25도까지 내려가고 평균 영하
10-15도에 머문다. 밤은 어찌 그리 빨리도 찾아오고 눈은 얼마나 많이 내리는지. 지금도 치밭목
산장을 지키고 있는 암캐 치순이(치밭목 순이)가 유일한 말동무였다."어떻게 견뎌냈어요"
하고 물으니,
"지난 일들은 잊어버리려고 노력해요"라며 웃고 만다.
지난 한해동안 지리산을 찾은 사람이 4백만명에 육박한다지만 치밭목 산장 이용객은 3천명을 밑돈다.
지금은 대원사 계곡 입구까지버스노선이 연결되고, 유평계곡을 거쳐 새재까지 자동차가 오가지만 여전히
'지리산의 오지'처럼 한산하다. 그러나 이것은 애써 치밭목을 찾는 사람에겐 더할수 없는 매력이다.
무제치기 폭포를 지나 산장으로 오르는 막바지, 산행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때 "컹,
컹" 치순이가 하늘을 보며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다 왔어요"
하는 것 같다. 게다가 민씨가 끓여주는 원두커피 한 잔(1천5백원)의 맛이란.
그는 올해 유난히 세인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지난 여름 악천후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난자를 구조한 공로로 경남도가 수여하는 '자랑스런 시민상'을 받았으며, 진주 마차푸차레 산악회의
히말라야 케다르나스원정대 대장을 맡기도 했다.
"조난구조는 산장 관리인의 첫번째 임무입니다. 5분 뒤를 모르는 것이 산악기후입니다.
날씨나 산행준비는 아랑곳없이 정상만 바라보며 악을 쓰고 올라가니 사고가 날 수 밖에요."
무뚝뚝한 그의 말씨가 둘도 없는 '경상도 사나이', 그것이다. 그는 이어 "산악활동은활발하지만
산악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등산로는 고속도로가 아니다"며
"특히 겨울산행에는 만반의 장비준비와 산에 대한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치밭목산장은 곧 시작되는 겨울산행 시즌을 앞두고 내부를 새로 단장했다. "산장관리인을
'신선놀음'쯤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넝마꾼에서 서부시대 보안관'까지 다양한
역할을 하며 24시간을 매달려야 하는 몇 안되는 희귀한 직업입니다."
여기서 그의 얼굴에 스치는 그림자를 발견한다. 진주에 있는 가족생각이 났을까. 부인은 지난
91년 첫딸을 출산하기 위해 산장에 올라온지 5년만에 하산했었다. 지금은 다섯살인 아들까지 1남1녀를
두고 있다. 한해에 가족들을 볼 수 있는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게다가 손익분기점에 턱없이
모자라는 산장수입도 가장(家長)노릇을 낙제점으로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산에 열심히 쫓아다녔죠. 결국 산장에 정착한 셈인데, 한 번 실수(?)가 평생을
좌우한 셈입니다." 또 한 번 웃고 만다. 경남 산청군 생초면에서 태어났지만 거창에서
중고교를 다닌 그는 '완벽한 알피니스트' 이기도 하다. 산에는 바위도 있고, 빙벽도 있고, 또
하루 온종일을 걸어다녀야 할 능선도 있는 것. 바위만 타거나 빙벽만오르거나 해서는 진정한 산꾼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여기에 선후배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이루는 인격도 빠뜨릴 수 없는 덕목이다. 그의'알피니스트'로서의
면목은 히말라야 원정에서도 확인됐다.
"돈에도 욕심이 없고, 허명(虛名)을 쫓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장 내년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산'과 '생활'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는
"그래도 등산꾼들이 찾는 한 올해도 이 산장을 지켜야지요"라며 거무튀튀한 얼굴에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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