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가다가는 농촌에 노인들만 남아”
운봉읍 화수리·가산리·매요리·임리·권포리·장교리 이야기
3월 중순, 지리산 주변엔 따사로운 햇볕 속에 봄이 오고 있었다. 하동읍 섬진강 건너 매화 마을에는 매화꽃 향기가 가득하다는
소식이 함께 전해 온다. 지난 달에 이어 운봉읍의 미처 돌아보지 못한 마을을 찾아나섰다.
남원에서 함양쪽으로 24번 국도를 따라가다 해발 470m의 여원재에서 잠시 차를 멈췄다. 마침 아마추어무선연맹 경기지부 회원
10여 명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 1년간 주말을 이용하여 백두대간의 고개 마루를 답사하며 환경보전 캠페인을 겸해 전국의
HAM들과 교신하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로 여원재 행사 후 덕유산 육십령으로 이동한다고 한다.
여원재를 지나면서부터 운봉땅이다. 면소재지로 들어서면서 함양쪽으로 2km 남짓 가면 왼쪽으로 황산대첩비 안내석이 나타난다. 이 일대가 화수리(花水里)로, 해발 600여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인 황산(荒山)이 있어 인근 아영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먼저 황산 밑에 위치한 황산대첩비를 찾아보았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이곳에서 왜군의 침입을 맞아 적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크게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선조 10년 운봉현감이 황산대첩비를 세웠다고 하나, 일제 말 일본인에 의해 비가 폭파되고 글자도 정으로 쪼아 알아 볼 수 없게 된 것을 1957년 10월 재건했다. 천여 평의 널따란 비각 경내에는 당시 폭파된 비석이 동강난 채 누워 있어 파비각이란 명칭으로 보호되고 있다.
비각 인근에는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 다음해 석벽에다 8원수 4종사관의 명단을 새겨 여러 사람의 공이 있었음을 기록하게 하였으나, 이것 역시 일제에 의해 쪼아 없어지고, 현재 그 잔영만이 석벽에 새겨진 것을 어휘각이란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황산 옆으로 흐르는 북천에는 당시 왜적의 시체가 즐비하였다고 하니 600여 년 전의 치열했던 전장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동편제 명인 송만갑의 출생지
마을 앞에 비각이 있어서 그렇게 불리는 화수리 비전(碑殿) 마을을 찾았다. 화수리는 운봉 서쪽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전촌리, 옥계리, 소석리 일부를 합했다.
이 마을에서 5대째 150여 년 대를 이어 살아오신다는 김택주(金宅柱·80) 할아버지를 만났다. 김순님(70) 할머니와 사이에 5형제를 낳아 기르셨지만, 지금은 노인 두 분만 살고 계신다.
일제 때 40여 호이던 마을이 지금도 40여 호로 큰 변화가 없다. 다만 옛날에 비하면 벼농사의 작황이 3배 정도 많이 나오고 있다. 품종이 개량됐고 비료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비전 마을은 고랭지지만 특산물도 없고 밭이 귀해서 옛부터 오직 벼농사에만 매달리고 있는데, 요즘은 그나마 생산원가가 높아져 벼농사도 어렵다.
일제 때 마을 사람들은 운봉읍의 대지주 땅을 얻어 어렵게 소작했지만, 소출도 적은 데다 무지막지한 공출에 시달려야 했다. 농사를 지어 놓으면 일인들이 조사 나와 마음대로 단위당 생산량을 책정해서 공출할당량을 통보했다. 공출량을 못 맞추면 즉각 불려가 몽둥이질을 당하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각종 공출은 면사무소 앞으로 집결하여 트럭으로 실어 내갔다. 생필품 조달은 읍소재지에 장터가 있어 집집마다 생산했던 삼베, 명주베 등을 짜서 장에 내다 팔았고 고기 등을 사왔다.
일제 때만 해도 인근 산에 소나무(육송)가 많아 김 할아버지 집도 60여 년 전에 지은 것이다. 육송으로 기둥을 세우고 벽면은 육송가지로 엮어 진흙을 발랐다. 산에서 나무를 하다 일인들에 들키면 혼이 나곤 하여 몰래 지게로 하나씩 져 날랐다. 김 할아버지의 집은 비전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 중의 하나다. 지붕은 초가에서 바뀌었지만 비스듬히 기울어진 기둥은 옛 시골의 정취를 그대로 느끼게 했다.
일제 때는 면소재지에 학교가 있어 부락에서 열댓 명씩 학교를 다녔다. 징용이란 이름으로 부락민들을 무차별 잡아가던 시절, 김 할아버지는 운봉국민학교 졸업 후 17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 구주탄광으로 끌려가야 했다. 하루 4원의 임금으로 한 달이면 쌀 3가마에 해당되는 100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징용자들은 현지에서 소비해 버렸다. 귀국시에는 1,000원 이상은 가지고 나오지 못하게 했다.
2년여의 구주탄광 생활에 김 할아버지는 다리를 다쳐 지금도 불편하다고 한다. 귀국도
잠시, 2개월 후에는 형님 대신 북해도탄광으로 징용을 떠났다. 러시아인들이 사용했던 북해도탄광은 엄청나게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굴이 무너져 매일 20여 명씩 죽어나갔다. 탄광에서 도망나온 김 할아버지는 북해도를 전전하다 해방을 맞아 5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국선을 탈 수 있었다.
여순반란사건 때는 반란군들이 마을에 들어와 쓸 만한 것은 전부 털어가곤 했다. 젊은 사람들은 잡아가기 때문에 곡식은 땅에 묻고
저녁이면 인근 산에 굴을 파서 숨어 지냈다. 6.25 전후 빨치산이 준동하면서 진짜 인민군은 별로 없고 현지 주민 중에 나쁜
놈들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인심이 워낙 좋았던 마을이라 큰 인명 피해가 없었다.
이 마을은 동편제의 명인인 송흥록과 송만갑의 출생지이자 명창 박초월의 성장터여서 지금은 그들의 생가터에 옛 초가집을 짓고 있고, 인근에 국악학교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조선조 말까지 이 마을에는 2층 정자가 있어 주변 주막의 기생과 소리꾼, 가마꾼들이 붐벼 역촌이라 불리기도 했다 한다.
과거 시험결과 붙였던 방고개
김 할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하며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가산리(佳山里)로 올라갔다. 가산리는 자연부락인 가산, 가운데말, 방고개, 양지촌이 합친 마을로, 조선조 성종 10년(1479년) 곡부 공씨가 처음 이곳을 개척하여 움막을 치고 터를 잡았다. 그 후 공씨는 3-4대 후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광해군 11년(1619년) 서산 유씨와 경주 이씨가 마을의 대종을 이루게 됐다.
가산리는 과거 교통의 요충지로 지리적으로 운봉 4개 읍면(운봉읍, 인월면, 아영면, 산내면)의 중심에 있다. 운봉 제일의 양지 마을로 살기 좋아 한창 번성할 때에는 아랫마을, 가운데 마을, 용바우골 등 마을이 세 곳이나 되었다고 한다.
특히 가산리는 마을 주변의 산세가 아름다워 불려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 동쪽으로는 황산이 솟아 있고, 암벽 지대인 마을 뒷산은 풍치도 수려할 뿐 아니라 옛부터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로 가산산성을 쌓아 대치하던 곳이다.
가산 마을 위의 방고개 마을은 조선조 중엽 이씨와 오씨 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지금은 박씨와 김씨들이 입주하여 마을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옛부터 운봉 관아가 있는 운봉읍과 권농병마사가 있는 아영 지역의 중간 통로였던 관계로, 이 고개에 운봉현 유생들의 과거시험 결과를 알리는 방을 붙였다 하여 방고개라 전해온다.
가산리에서는 최봉도(84) 할아버지를 만났다. 22세 때 결혼하신 황분순(72) 할머니와 두 분만 살고 계셨다. 당초 함양에서 태어나 20대 초 징용으로 북해도에서 3년간 고생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부모님이 할아버지의 고향인 운봉으로 이주해 계셨다. 물어 물어 부모를 찾았다. 귀국할 때 800원의 적지 않은 돈으로 운봉에 정착하게 되었다.
가산 마을은 현재 50여 호가 살고 있으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객지로 떠나 버려 몇몇 빈 집들이 잡초더미 속에 폐가가 돼 가고 있었다.
최할아버지 기억으로는 일제 때 인월장이 있었으나 운봉 주민들이 인월장을 가지 말자고 하면서 운봉장을 세웠다고 한다. 여순반란사건 때는 큰 고생도 없었고 별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가산리 뒤쪽으로 야트막한 야산을 넘으면 88올림픽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사명당이 마을 이름 고친 매요리
가산리를 내려와 매요리(梅要里)로 향했다. 남원의 마을 유래에 따르면 임진왜란 전후 진주 강씨와 양성 이씨는 왜적의 침범이 잦을 것을 예상하여 지리산 능선을 따라서 북쪽으로 수정봉과 고남산을 차례로 지나 매요리에 터를 잡아 중시조가 되었다.
마을의 지형이 고남산과 황산의 줄기로 장수군과 경계선 상에 위치하고, 좌청룡 우백호 날줄기가 마을을 포옹하듯 휘감았으며, 북쪽 뒷산이 구릉을 이루어 방풍 구실을 하니 풍해와 수해가 없어 농사에 더 없이 좋은 길지다. 옛부터 이러한 지세는 말의 허리 형국을 닮았다 하여 마요(馬腰)리라 칭하게 되었다.
그후 임진·정유 양난이 7년만에 끝나자 사명당 유정이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하여 보니 매화의 꿋꿋한 정기와 순결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이 마을에서 낳은 사람들은 매화같이 선량할 것이니 지형과 인심에 맞게 매요리로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 하여 매요리로 바뀌었다.
수소문 끝에 이 마을에서 3대째 살아오신다는 김용준(金容準·70)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오옥례(67) 할머니와 사이에 6남매를 낳았지만 역시 객지로 다 나가 있었다. 일제 때 70여 호이던 마을이 해방 후 고향을 찾아들어온 사람들로 인해 한때 100여 호 이상으로 늘어났었으나 현재는 다시 70여 호로 줄었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노인들로 60세 미만이 7,8명 정도 밖에 없다. 때문에 농사도 노인들이 짓고 있다 한다. 앞산의 형국이 말의 허리 같다고 하여 옛부터 마을의 학생들이 뜀박질을 잘 하였고, 국가대표 배구선구인 이재필의 고향이라고 은근히 자랑하신다.
또한 옛부터 글이 안 떨어지는 마을이라 하여 문장을 잘 짓는 사람들이 나온다고 한다. 일제 때는 마을 주민 두 명이 징용을 당하였으나 무사히 돌아왔고 일제 때부터 마을 주민들이 모여 살았다. 매요리에는 해방 후 1951년에 운성초등학교가 개교되어 한때는 400여 명 정도의 학생이 다녔으나 인구의 고령화와 젊은 사람들이 객지로 나가면서부터 초등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6년 전 폐교되었다. 현재는 통학버스가 서너 명의 초등학생을 태우기 위해 면소재지에서 왕복하고 있다
“마을에서 애들 울음소리가 끊어진 지 오래 됐어요.”
김 할아버지는 이야기 도중 갑자기 옛일을 회상하시며 한 말씀 하셨다. 매요리에는
고가를 허물고 해방 후 신축한 집이 많지만 오래된 집이 몇 채 남아 있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당산제를 지냈는데, 한학자 한 분이 돌아가신 후에는 그것도 사라져 버렸다. 주로 아들 못낳는 사람들이
제를 지냈고 당산제 후에는 집집마다 문앞에 황토를 갖다 놓아 액막이를 했다. 5~6년 전부터는 당산제 대신 음력 정월 보름에
달집 태우는 행사를 시작했다. 소나무를 베어 다발로 묶어 쟁여 놓고 그 앞에는 곳감, 대추 등 과일을 진열하고 음식물을 준비하여
달이 뜨면 불을 질렀다. 동네 사람들은 축문을 읽고 절을 하며 부락의 평안을 달님에게 빈다. 불 피운 달집 주위를 빙빙 돌면서
지난해 쓰다 버린 옷가지 등을 태우기도 한다.
평생에 제일 고생스러웠던 때가 일제 때로서 빈부고하 간에 생산된 식량은 공출로 다 뺏기고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시절이라고 한다. 돈을 가지고도 쌀을 못살 형편이었다. “초근목피 시절에 이산가족이 제일 많이 생겼지요” 말씀을 마치시면서 김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매요리를 돌아나왔다. 동네 초입에 폐교된 운성초등학교의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1층 건물 몇 동의 담벽에는 담쟁이덩굴이 말라있고, 개교 24주년 기념을 알리는 간판이 철문에 붙어 있었다. 폐허의 운성초등학교가 우리 농촌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허전한 마음으로 다음 마을인 임리로 향했다.
“벼농사론 공부시키기 어려워”
고남산 정상이 손에 잡힐 듯하다. 백두대간 줄기가 이 고남산과 매요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환상도로를 따라 임리(林里)로 들어섰다. 임리는 숲이 많아 당초 숲말이라고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임리라 했다. 아직도 이곳 부락민들은 숲말이라 부르고 있었다.
조선 선조 때인 1580년 천안 또는 완산 전씨가 처음 정착했다고 하는데, 현지 주민들은 정씨라고도 해 확실치 않다. 최초 입주민들은 소나무숲 풍치가 아름다운 이곳에서 2~3대에 걸쳐 생활하다 떠나고 1700년경에 장씨와 강씨가 어느 도사의 계시를 받아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10대를 넘어 살아오신다는 진주 강씨인 강석주(姜錫周·73) 할아버지를 만났다. 조상림(70) 할머니도 함께 이야기에 동참하셨다. 5남매를 낳아 전부 객지로 보내고 91세의 노부와 함께 생활하고 계신다. 임리는 옛부터 풍수상 길지로 알려져 있고 원님의 행차시 마을 앞에서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어먹던 곳이라 하여 밥재이들이란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일제 때는 98호나 되는 제법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40여 호 남짓 된다. 남원쪽만 해도 벼를 추수한 후 곧 보리를 갈아 봄에 수확하지만 운봉은 고랭지로서 논에 이모작할 시간이 없다 한다. 소 돼지를 기르는 집이 있지만 규모는 크지 않다. 해방 전부터 해방 후까지도 삼베 명주베 등을 생산했다. 징용으로 끌려갔던 마을 주민들이 더러는 돌아오지 못했다.
주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많아 새(풀)로 지붕을 엮은 나무집이 많았다고 한다. 일제 때 장을 보기 위해서는 연재를 넘어 이백면 양가리를 지나 남원까지 하룻길을 걸어 다녔다. 여순반란사건이 나면서 임리 주민들이 소개되어 젊은 사람들은 외지 멀리까지 나가야 했다.
현재 마을에는 60세 안팎 할머니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한다. 6.25때가 제일 고생스러웠다는 강 할아버지는 역시 식량 고생을 이야기하셨다. “소나무 껍질에 쑥국 먹고 살았지요.”
요즘 벼농사로는 자식 공부시키기 어렵다. 1가마 15만 원이면 원가 제하고 1마지기에서 쌀 1가마 정도 남을 뿐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지내던 당산제는 10여 년 전부터 젊은이들이 미신이라고 반대해서 지내지 않고 있다.
마을 이장과 농협 마을조합장까지 지내신 강 할아버지는 농가 부채를 걱정하고 계셨다. 영농자금, 학비, 축산자금을 농협이나 신협, 새마을금고 등에서 대출 받았으나 목돈을 만들 수 있는 가을 수매기 때 원가를 제하면 1년 농사한 것이 별로 남는 것이 없다. 이로 인해 대출금이 연체를 거듭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강 할아버지와 대화를 마치고 옆 마을을 찾았다.
봉락골 어딘가에 있을 여덟 명당
운봉읍 권포리(權布里)는 바로 고남산 밑에 있다. 고남산은 이성계 장군이 왕업을
이룬 것과 연관이 있다 하여 일명 태조봉, 또는 제왕봉이라 하였다. 제왕봉이라 하면 모든 산의 제왕이 되므로 이러한 지형을 살리기
위해서는 마을 이름이 권력을 편다는 의미를 상징해야 된다며 정도전이 마을 이름을 권포로 지었다고 한다.
권포리는 고려 말 약 10여 호의 주민이 개척하면서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고남산에 큰 산사태가 일어나 매몰되고 1500년경에
현 위치에 권씨들이 터를 잡아 살고 있다. 마을 뒤쪽 통안재 북동쪽에 위치한 봉락골은 경주 정씨 선산이 있는 곳으로 보기드문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남쪽 1km 지점의 팔봉에는 명당 여덟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 이 말을 믿는 많은 도사와 일반 사람들이 8명당을 찾아 헤맸으나 아무도 그 혈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명당의 지기가 다 하였는지 여덟 명당자리에서 봉황 여덟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올라 북쪽을 향해 날더니 상사바위 뒤쪽에 내려 앉았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명당자리가 옮겨온 것이라며 이곳을 봉락골이라 불렀다. 지금도 봉락골 어디엔가 8개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온다.
권포리에서는 김기태(金淇汰·67) 할아버지를 만났다. 유홍임 할머니와 사이에 3형제를 낳았고 현재는 막내와 함께 살고 계셨다. 8대째 이 마을에 살아오는 김 할아버지는 국민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일제 때 140여 호 되던 마을이 지금은 80여 호로 줄었다.
마을 외곽에는 대규모 축사에서 소를 키우고 있고 타지인이 들어와 양계업을 하고 있다. 다른 마을에 비해 젊은 사람들이 있는 편이어서 동네에 간간이 청년들의 모습이 보이고 경운기 등으로 봄농사에 필요한 퇴비더미들을 나르고 있었다. 고남산은 일제 때부터 육송이 많았지만 무분별한 도벌로 많이 베어졌다. 현재는 나무를 때지 않아 소로도 잡목으로 덮여가고 있다.
당산제 등 마을의 민속행사가 없었으나 몇 년 전부터 이웃 마을처럼 달집 태우기 행사가 있다고 한다. 마을에는 아직도 옛 허름한 집들이 있었으나 신축한 양옥들도 지은 지 10년 미만이라고 한다. 15년 전 마을 앞 순환도로가 나기까지는 운봉까지 어렵게 걸어다녔지만 지금은 간간이 마을버스가 들어오고 있다.
김 할아버지도 일제 때 식량이 없어 소나무껍질과 칡뿌리로 지낼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은 귀농보다 이농 숫자가 늘어나면서 고령화 현상이 눈에 보이고 빈 집이 늘어나고 있다 한다. 우리 농촌의 미래상이었다.
인근 고남산에는 큰 맹수는 없었지만 해방 후에는 늑대가 많아 가축 사육에 피해가 있었다. 권포리를 돌아나오며 올려다본 고남산에는 중계탑이 우뚝하고 논은 이미 갈아 놓아 봄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이성계가 삼일기도 드린 곳
다시 24번 국도 근처로 내려와 장교리(長橋里)를 찾았다. 장교리는 장교, 장동, 연동 등 3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돼 있다. 삼국시대부터 천씨 세 가구가 움막을 치고 터전을 잡았으나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이에 이성계 장군이 이두란, 변안렬 등 장군을 거느리고 이곳을 지나면서 고남산에서 3일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이때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지형을 살펴보니 고남산 줄기가 마을까지 뻗어내린 모양이 마치 긴 교량을 가설한 듯하므로 마을 이름을 장다리라 지어 주면서 이 마을은 장차 이씨와 김씨의 터가 될 것이라 예언하였다. 또한 이성계가 고남산에서 3일기도를 드린 후 왜구를 물리치고 제왕이 되었기에 고남산을 제왕봉이라 불렀으며, 제왕봉의 정기를 받아 마을이 부촌을 이루고 도적이나 재앙이 없이 대대로 태평하였다고 한다.
인근의 장동 마을은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자는 형국이라 하고, 연동 마을은 마을 뒤 노루봉과 마을 앞 연못의 연꽃이 아름다워 연골이라 불리다가 한자로 지명이 바뀐 것이다. 여원재는 조선시대 여원(女院)이 있던 자리로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남원장을 보러가는 사람들로 붐볐고 주막이 있던 곳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교통편의 발달로 집터 흔적만 남아 있다.
장교리에서 만난 김귀열(金貴烈·69) 할아버지는 12대째 장교리에 산다며 구전되어 오는 여원재의 전설을 들려 주었다. 지금의 고개 바로 밑에 원터가 있었다. 이 마을에 살던 한 사람이 이방과 원의 잘못으로 억울하게 죽게 되었다. 이 사람은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염을 하지 말고 원터에 묻되 손에 칼을 쥐어 달라고 했다.
그 후 고개를 넘어 남원으로 부임하는 원님 앞에 죽은 자의 혼이 나타나 억울함을 아뢰고자 했으나 그 때마다 원님이 실신해 버렸다. 한 어사가 그 사실을 알고 원혼을 달래는 어사비를 세운 다음에야 다시는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어사비는 해방 후까지 고개에 있었으나 도로확장공사로 땅속에 묻혀 그후 찾지 못한다고 한다. 70대 이상 노인들은 어사비를 보았다고 한다.
여원재에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온다. 조선조 초기 홍 정승이란 분이 전국을 유람하다 여원재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올라 고개 마루 여원에 이르러 말을 풀밭에 쉬게 하고 잠시 휴식 후 돌아와 보니 말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에 말 발자국을 따라갔더니 현재 연동리 한 곳의 따뜻한 양지쪽에 누워 있는지라 수행원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홍 정승에게 아뢰었다. 홍 정승은 이곳이 길지임을 알고 남양홍씨 자손을 이주시켜 홍씨 마을을 형성하여 크게 번창하였다. 그 후 홍씨들은 타지로 이주하고 영조 때 전주 이씨와 김해 김씨가 장교 마을에서 분가해와 본격적인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일제 때는 다른 마을에 비해 징용을 많이 가지 않았다. 고남산 줄기가 흘러내린 뒷산에는 동학란을 피하기 위해 주민들이 힘을 합쳐 쌓은 성이란 뜻의 합민성이 있다.
이웃 마을 권포에는 사상가가 많아 여순반란사건이나 6.25 전후해서 피해가 컸으나 장교리는 별 피해가 없었다. 해방 무렵에는 고남산에 늑대가 많았던 것이 기억이 나고 해방이 임박하면서 징용이 강화되어 도망다니고 식량이 부족하여 초근목피로 생활하던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일본인들보다 일인들에 아부하는 조선인들이 괴롭혔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모두 마을을 떠나고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자식들도 잘되진 않았다고 한다.
타지에 비해 마을 부채도 별로 많지 않다. 20여 년 가까이 이장 일을 보았다는
김귀열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마치며 한 말씀 하셨다. “이곳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해 먹고 사는 일뿐 이에요”
운봉읍을 두루 살펴 보았다. 남원쪽으로 차를 몰았다. 해발 470여m의 고원분지 운봉은 평화롭기 그지없고 인심 좋은 마을이었다.
바래봉과 고남산이 언제나 운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