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마을 >>

 인심 순후하고 효심 지극한 고원 분지
 운봉읍 용산리·동천리·준향리·행정리·덕산리 마을 이야기

2월 초순, 새벽 안개 속에 남원을 떠나 오늘의 목적지인 운봉으로 향했다. 남원 시내 외곽을 벗어나면서 지리 연봉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내기 마을을 지나면서 24번 국도는 줄곧 오르막길이다. 이내 몇 백m의 고도차를 느끼며 해발 470m에 위치한 여원재(속칭 연재)의 정자에서 잠시 차를 멈췄다.

이곳은 옛날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로서 늘상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이 여원재를 지나 약간의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 운봉읍이 시작된다. 운봉(雲峰)은 지난 95년 면에서 읍으로 승격됐다. 삼한 시대에는 진한의 영토였고, 삼국시대에는 모산현으로 신라의 국경 요새지였다.

남원시내에서 동쪽으로 50여 리 떨어져 있는 운봉읍은 동쪽으로 고원지대인 산내면과 서쪽은 이백면, 남쪽으로는 주천면과 접해 있고 북쪽은 아영면과 접해 있다. 지리산 북서쪽 끝자락에 해발 450∼650m의 고원분지 형태를 이루며, 바래봉과 부운치, 세걸산, 고리봉 등의 능선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합수하며 멀리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농업용수가 넉넉한 고지대로서 기후의 영향으로 전북에서 제일 먼저 추수가 시작되고, 고랭지 채소와 감자, 마늘 등을 생산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는 화훼단지가 들어서면서 안개꽃 백합 등이 대규모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고 있다. 특히 안개꽃은 해발 700m 이상 고지대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품질이 우수하고 꽃빛이 선명하여 타지방 보다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88년부터 재배하기 시작한 안개꽃은 이 지역 농가소득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해방 후 도벌이 더 심해

먼저 운봉읍 소재지에서 바래봉쪽으로 제일 가까운 마을인 용산리(龍山里)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어디서나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이 올려다보인다. 봄기운이 대지에 퍼지는 듯하지만 아직도 바래봉 일대는 흰 눈이 덮여 있다. 바래봉 밑에는 국립면양종축장이 있어 박 대통령 시절 외국에서 수만 마리의 면양을 사다 길렀으나 사육에 실패하고 지금은 수백 두의 소를 기르고 있다.

당시 기르던 양들이 독이 있는 철쭉나무는 건드리지 않고 다른 풀만 먹어치워 뜻밖에 철쭉동산이 되어 버렸다. 남원시에서는 매년 철쭉제 행사를 벌이고 있고, 올해에는 종축장 위 바래봉으로 오르는 도로를 넓히려 하고 있으나 사유지 보상문제 등으로 주민들과 협상중이다.

수소문 끝에 용산리에서 13대째 살아오신다는 김형순(金亨淳·71) 할아버지를 만났다. 최희순(67) 할머니와 사이에 2남 2녀를 낳아 길렀으나 전부 객지로 나가고 지금은 내외만이 살고 있다.

용산리는 450여 년 전 단양 우씨와 원주 우씨가 처음 터를 잡았는데, 그후로 이씨, 김씨 등이 차례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금 우씨와 이씨 가문은 쇄락하고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 그리고 외지인들이 약간 들어와 살고 있다.

전해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 동쪽, 지리산 끝자락인 덕두산 중턱에 용이 나는 듯한 형국을 한 용오름산이 있어 인물이 나면 역적 노릇을 한다 하여 오랜 옛날 이석우란 풍수가가 용의 목부분을 잘라 버렸다고 해서 용산리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당초 용산리는 마을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풍수상 현재의 위치로 내려와 자리잡게 되었다.

당산나무는 옛 마을에 있다. 음력 초사흗날이면 깨끗한 몸의 제주가 밤 11경 혼자 당산나무가 있는 옛 마을로 올라가 제를 모신다. 이때쯤이면 마을 샘을 깨끗이 청소하고 부정이 타지 못하도록 금줄을 두른다. 조금이라도 불결하게 제를 모시면 당산나무 옆에 호랑이가 내려와 제주에게 흙을 뿌렸다고 한다.

현재 53가구 160여 명이 살고 있는 용산리는 왜정 때 80여 가구로서 지금과 마찬가지로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 삼베와 누에도 많이 길렀다. 초가집으로 집단부락을 형성하고 있던 옛날에는 지붕에 짚이 많이 쌓일수록 부자였다고 한다. 돈 있는 사람들은 초가 대신 한번 이으면 20년 정도 간다는 억새 종류인 쌔로 지붕을 잇고 살았다. 지붕은 비가 새지 않도록 삼대를 벗기면 나오는 제릅이란 것으로 엮어 지붕을 먼저 씌우고 그 위에 쌔나 볏짚을 얹었다. 돈이 많이 들어가던 이런 집들은 아직도 고기리 내기 마을에 3채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왜정시 마을 청년들은 대부분 징용으로 1년 이상 일본의 탄광으로 끌려가기도 하고 머슴살이도 했다. 특히 논의 수확량도 많지 않아 소작에 어려움이 많았다. 나무를 파서 고무신같이 만들어 나무신을 신고 살았다고 김 할아버지는 회고하셨다. 무성하던 지리산 주변의 나무들이 해방되면서 도벌과 무분별한 허가로 군인차까지 동원되면서 나무들이 잘려 나갔다. 또한 집집마다 나무를 때서 생활하게 되니 60년대 초에는 산 전체가 민둥산으로 변했다.

60년대 초 어느 날 밤인가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폭우 피해로 산에서 물이 밀려와 농가 11호가 떠내려가고 2명이 죽음을 당했다. 운봉장이 서던 현재의 운봉초등학교 앞터에는 돼지, 소, 쌀, 콩, 팥 등이 나왔고, 당시 귀했던 소금 등으로 바꾸어가기도 했다. 소는 중요한 살림의 일부로 소 한 마리를 살림의 반쪽으로 알고 살았다. 마을에는 소가 돌리는 연자방아 종류의 큰 맷돌이 있어 나락을 찧었다.

학교 다니는 학생이 많지는 않았으나 인월면에서 3학년까지 마친 간이학교 학생들이 운봉국민학교에 편입하여 6학년 졸업을 마쳤다. 김 할아버지 국민학교 시절에는 매년 음력 10월에 시제를 모셨는데, 그 때마다 묘에 눈을 쓸었던 기억에 비하면 지금은 기후가 많이 따뜻해졌다고 한다.

남원에서 여원재를 넘어 인월에 이르는 운봉을 지나는 국도는 왜정 때 비포장 1차선도로로서 운봉읍 경계부터 황산교까지 주민이 나서서 도로가 패이지 않도록 돌을 깨서 넣기도 하며 구간별로 나눠 관리했다. 남원까지 목탄차와 카바이트를 연료로 썼던 가스차가 하루에 네 번 왕복했는데, 여원재에서 힘이 부쳐 못오르면 모두 내려 뒤에서 밀기도 했다. 큰 도회지를 가기 위해서는 남원까지 나가 기차를 탔지만 비싼 목탄차를 탈 수 없어 남원까지 30리를 걸어다니기 일쑤였다.

지금은 산에 나무가 무성해지고 불도 나지 않아 산길도 없어지고 짐승도 다닐 수 없게 되었지만, 왜정 때는 산에 올라 작약 등 희귀 약초도 많이 캐냈다. 마을 사람들은 지리산이 신령스런 명산이라 하여 기도를 하고 들어가야 호환 등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 마을 인근에는 땅이 움푹한 곳에 지었다 하여 우무실절이라는 절이 있다.

여순반란사건 때는 마을에 피해가 없었으나 6.25 이후 빨치산의 준동으로 인해 피해를 많이 보았고, 밤이면 젊은 사람들은 운봉읍으로 가서 자고 오기도 했다. 더러는 빨치산에 잡혀 짐을 지고 올라갔다가 영영 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칠십 평생에 제일 고생했던 때는 6.25 지나 보릿고개였다. 식량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 주식이었던 보리가 채 영글기도 전에 베내어 솥에다 쪄서 멍석에 비비고 갈아서 먹었다. 감자도 귀했다. “요새 쌀의 질이 나빠 못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김 할아버지의 한숨섞인 충고였다.

마을 뒤로 바래봉 오르기 직전 산중턱에는 옛부터 호랑이굴이라 불려오는 굴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왜정 때만해도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었다. 눈 덮인 바래봉을 바라보며 호랑이의 포효를 상상해 보았다. 김 할아버지의 건강하심을 빌며 용산리를 내려왔다. 운봉 읍소재지까지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는 비록 울퉁불퉁한 길이었지만 냇가에 억새가 태양빛을 받아 더욱 반짝이며 그야말로 시골길 정취가 물씬 배어나온다. 논두렁에 흰눈이 남아 있었지만 봄이 어디선가 오고 있었다.

비행기 헌납한 거부 살던 마을

운봉읍 한가운데 24번 국도가 통과하는 동천리(東川里)로 내려왔다. 이 마을은 지리산의 부운치와 팔랑치에서 발원한 물이 내를 이루며 운봉읍을 가로지르는데, 개천 동쪽 마을은 동천, 서쪽과 북쪽 마을은 각각 서천리, 북천리라 부른 데서 유래됐다. 동천리는 1972년 행정편의상 상하로 구분하여 동상 마을과 동하 마을로 나뉘었으나 마을의 형성과정은 동일하다.

오래 전부터 동천리는 밀양 박씨가 정착하여 큰 문중을 이루었고 지금까지도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박씨들이 처음 정착하게 된 것은 고려 초로 추정하고 있고, 크게 번성하여 흔히 운봉 박씨라 불리는데, 동천리 거주 박씨는 동박, 서천리 거주 박씨는 서박이라 불렀다. 그중 서박의 박희옥이란 사람은 왜정 때 만석꾼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운봉이란 지명은 중국 송나라에 운봉이란 고을이 있는데, 그곳에도 동천 서천 북천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지형이 중국의 것과 닮았다 하여 모든 지명과 하천 이름까지 송나라 운봉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 한다. 이곳 동천리에는 우체국과 축산고등학교, 그리고 금융기관 등이 자리잡고 있어 활기찬 운봉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운봉노인복지회관을 찾아 운봉읍 노인 회장직을 맡고 계시는 김종인(金鍾仁·79) 할아버지를 만났다. 75세의 오희순 할머니와 사이에 2남7녀를 낳아 기르셨다. 300여 년 전 7대 조부께서 여원재 옆 장교 마을에 들어와 정착했는데, 김해 김씨인 할아버지는 길 건너 서천 마을에 살고 계셨다. 운봉 읍소재지는 서천에 자리잡고 있다.

왜정 때는 1만여 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고 해방되면서 외지에 나갔던 사람들이 들어와 한때는 12,000여 명까지 늘어났었으나 현재는 6,000여 명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 대부분이 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고 일부 외지인들이 들어와 장사를 하고 있다. 고랭지인 관계로 남원과는 보름 정도 차이로 기후가 다르다고 한다. 한때 고랭지 배추와 감자 등을 했으나 판로가 없어 포기한 상태고, 주민들이 점차 고령화하면서 농사일에 손을 떼고 객지에 나가있는 자식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살고 있다.

마침 노인회관의 점심식사 시간이 되었다. 회관 안에는 인근 마을에서 모인 노인 10여 분이 교대로 당번을 정하여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고, 할머니들은 보이지 않았다. 1시간 가량 먼 곳에서도 회관을 찾아오시는 노인들이 있었다. 1년에 90만원씩 나오는 정부의 보조로는 기름값도 힘들어 마을 노인들이 자비를 걷어 운영해 가고 있었다. 밥 한 공기에 반찬 한 가지인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점심 후엔 귤과 커피 한 잔씩이 따랐다. 텔레비전에서는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라톤 생중계 방송이 한창이고 할아버지들이 열심히 응원하고 계셨다.

점심을 마치고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농사는 해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보리는 생산비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에 비해 눈도 많이 오지 않고 냇물이 얼지 않는다. 왜정 때는 운봉에 5일장이 섰으나 규모는 보잘 것 없었고 기억나는 것은 쌀과 고추가 많이 나왔다. 왜정 때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고, 젊은 사람들은 징용으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왜정 때 운봉초등학교가 있었고, 해방되면서 인구 유입이 늘어나 분교가 4곳 생겼으나 젊은이들이 객지로 나가면서 초등학생이 급격히 줄어들어 작년부터는 분교가 모두 문을 닫았다. 교육청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마을순회버스 2대가 등하교길의 학생들을 수송해주고 있다.

운봉도 여느 마을과 같이 왜정 때는 산림이 무성했으나 8.15 해방 후 벌목으로 큰 피해를 당했다. 남원~인월간 도로는 새마을사업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지금처럼 포장이 완료됐다. 운봉읍내는 자연수를 이용할 수 없어 집집마다 지하수를 파서 상수도로 이용하고 있다. 당산제를 아직도 지내고 있으나 과거의 당산나무는 없어지고 옛날부터 내려오던 자리에서 제를 지낸다.

마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개천은 풍수상 배의 형국이고, 운봉이 배의 앞머리 부분에 해당된다 하여 개천이름을 선두천이라 부르고 있었다. 개천 건너 서천리(西川里)는 서상, 서하, 서남 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서천리와 인접한 마산(馬山)은 과거 서면 사람들이 넘나들던 곳으로 말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형국이란다.

말의 머리 부분이 고개에 해당하여 준향 마을로 향하고, 말의 꼬리가 옛날 운봉관아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야제당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마산 고개에 왜정 때 신작로가 나면서 대혈이 잘려나가 버렸다. 서천이 흐르는 안쪽 서림숲은 서천리 당산으로 더위를 식히는 마을 휴식처로 사용되고, 마을을 수호하는 석장승 2기와 각종 비석군이 산재해 있어 서천리가 역사와 전통이 있는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회관에 모여 있던 할아버지들이 이구동성으로 농촌 부채의 심각성을 말씀하신다. 농촌부채의 큰 짐은 농사로 인해 진 빚보다 젊은 사람들이 농민후계자로 대출받은 돈이 더 많아 문제가 있다 한다. 결국 농민후계자로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순반란사건 때는 반란군이 나흘간 운봉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토벌대와 접전은 없어 인명피해가 없었다. 김 할아버지는 우편관련 공직에 33년 봉직하시다가 77년 정년 퇴임하시면서 옥조근정훈장을 받으셨다.

삼재가 들지 않는 살기 좋은 마을

동천리를 떠나 준향리로 향했다. 남원 방향 국도변에서 비포장도로로 한참을 들어간 곳에 준향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는 74세의 유정열(柳正烈) 할아버지를 만났다. 9남매를 낳았지만 전부 객지로 나가고 지금은 76세의 오재금 할머니와 두 분만이 살고 계셨다. 원래 함양에서 살던 노할머니가 8대조 할아버지를 업고 준향리로 이주하면서 유씨가 준향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준향리가 형성된 것은 고려 초기로, 협계 태씨가 정착하여 약 400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그후 1390년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 서씨가 이주해 왔고, 그후로 차츰 배, 김, 유씨들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세가 무난하여 천재지변이 없고 산수가 수려하니 유행병이나 괴질이 없었다. 인심이 순후하여 도적이나 짐승이 침범하지 않아 삼재가 없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 하여 향촌(香村)으로 부르다가 그후 서씨와 유씨 등이 정착하면서 준향 또는 준행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말 서씨들이 처음 정착할 때는 화전민 생활을 하였으나 차차 평지를 개척,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윤택해졌다. 지금은 벼농사 외에 비육우와 고랭지 채소를 가꾸어 소득을 많이 올리고 있다. 마을 앞 동쪽으로 준향천이 맑게 흘러 풍치가 아름답고 새마을사업 이후 한층 윤택한 마을이 되었다. 마을의 지세 때문이었을까. 이 마을에서 만난 다른 두 할아버지는 자그마한 친절에도 그 고마움의 표시가 순박하기 그지없다.

왜정 때는 60여 호였고 지금은 40여 호로 줄었다. 벼농사가 주업이지만 10여 호가 소나 돼지를 부업으로 기르고 있다. 옛부터 특산물도 없고 오로지 농사에만 의지하며 살았다. 보리를 주로 갈아 식량으로 했고 대부분 자가식량 정도의 농사일을 했다. 왜정 때는 지리산에 유난히 소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전형적인 순박한 농촌마을이 준향리였다.  

인심 순후하고 효심 지극한 마을

준향리에서 돌아나와 인근의 행정리로 찾아 올라갔다. 행정리는 산세가 유순하고 풍부한 농업용수로 농사에 어려움이 없어 마을 인심이 대대로 순후하고 평안하여 효심이 지극한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효자비와 공적비 등이 전통과 효성을 중시해온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행정(杏亭) 마을이 형성된 때는 1769년경으로 추정된다. 처음에 풍산 유씨가 입주하여 살다가 모두 준향리로 옮겨가고 그 뒤 입주한 창녕 조씨들이 이곳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어 김씨, 최씨, 정씨가 차례로 입주했다.

조씨들이 새로 들어와 정착할 무렵 이곳 일대에는 은행나무가 숲을 이루어 풍치가 아름다워 사람들은 이곳을 은행마을, 은행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이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은행리가 되었는데, 이를 줄여 행정으로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서 6대째 살아오신다는 86세의 조영옥(曺永玉) 할아버지를 만났다. 양순남(81) 할머니와 함께 살아오시며 3남매를 두셨다. 조 할아버지의 왜정 때 기억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부락마다 서당이 있던 시절, 행정 마을에도 서당이 있어 한문을 배웠다. 부모들은 1년에 한 번 훈장께 쌀을 조금 갖다드리는 것이 수업료의 전부였다.

왜정 때는 국민학교 다니라고 일본 선생이 잡으러 왔고 이를 피해 다녔다. 국민학교에 들어가면 긴 머리부터 잘라야 했다. 무슨 연유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학교 다니면 죽는다고 한사코 숨어 다녔지만, 지금 생각하면 배우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여러 번 강조하신다.

왜정 때도 50여 호의 자그마한 마을이었고 지금은 더 줄어 30여 호 정도가 모여 살고 있다. 100% 농사일만 했고 일본인들의 각종 공출요구에 시달렸다. 의무적으로 집집마다 공출 배당이 나와 할당량을 못채우면 갖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길쌈을 할 때는 동네 아낙들이 마당에 모여 관솔불을 밝혀놓고 밤새 베를 짜기도 했다. 대부분 소작농을 하던 왜정 때는 하루 일하면 1되 정도의 식량을 구할 수 있었고 1가마의 식량을 빌려오면 닷말분의 이자를 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마을에는 최부자라는 천석꾼이 있어 부자를 따라다니던 외지인들이 들어온 것을 제외하고는 마을의 절반이 지금도 조씨 집성촌이다. 왜정 때는 산에 올라 나무를 하고 약초도 캤다. 많은 사람들이 징용으로 끌려갈 무렵 조 할아버지도 징용으로 나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직전 부산에서 도망쳐 왔다.

마을의 인심이 순박하여 사상에 물들지 않고 농사에만 전념했고 6.25때는 빨치산을 피해 산속에 굴을 파놓고 숨어지냈다. 현재 병든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조 할아버지는 대학 다니는 손자의 학비로 올해도 11마지기 논 중 일부를 팔아야 한다고 걱정하고 계셨다. 이로 인해 올해부터는 농사도 지을 수 없다고 하셨다.

객지로 나가는 집이 늘어나 빈집이 생기면 옆집이 사서 뜯어 버려 빈 집이 없다. 수심에 잠긴 조 할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하며 행정리를 뒤로 한다. 행정 마을 한쪽에는 특이한 동산이 형성돼 있고 마을 사람들은 이를 행정숲이라 부르고 있다. 소나무 절반과 삐쭉이 큰 서나무가 두 개의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

운봉에서 가장 넓은 벌판 마을

행정리를 떠나 처음 찾았던 산덕리(山德里)를 다시 올라갔다. 미리 약속해 두었던 김판석(金判石·80) 할아버지를 만났다. 최덕순(76세) 할머니와 6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360여 년 전 12대 선조께서 산덕리로 이주해 오셨다. 산덕리는 운봉에서 제일 큰 들이 있어 옛부터 천마지기들이라고 불렀다. 운봉을 통틀어 고기리들, 화수리들 등 3곳에 천석꾼이 살았으나 이곳 산덕 마을 앞 들이 제일 넓다고 한다.

산덕리는 고려말 동복 오씨가 명산의 정기를 모은 이곳 길지에 터를 잡아 그 효험으로 평화롭게 살아왔다고 한다. 지리산 줄기가 이어져 고리봉, 세걸산, 바래봉이 산세를 갖추고, 바래봉 밑 정기를 받은 이곳은 옛부터 화기가 감돌고 수려하여 동복 오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산제당을 지어 산의 덕을 받아 마을이 태평하기를 기원한 데서 산덕 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마을 위 바래봉이란 본래 ‘발산’(鉢山)이라 하였으며 곧 운봉향교의 주산이 된다. 바래란 나무로 만든 승려의 밥그릇인 바리란 뜻으로, 운봉10경 중 바래봉 달빛 아래 들리는 경쇠소리가 있듯이 산제당과 많은 절이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호랑이굴이라고 불리는 굴 아래쪽에는 쟁기절 터라고 불려오는 44정보의 넓은 터가 산속에 숨어있듯 자리잡고 있다.

신축년 대홍수 때에는 이곳에서 주춧돌, 담, 독, 화로 등이 발견됐고 절의 유물이라 추정되는 약 50~60㎏짜리 팔각돌이 나왔다. 이 팔각돌에는 부처가 그려져 있었고 비가 오려면 서기가 흘러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발굴한 집에 팔각돌을 보관한 후부터 우환이 끊이지 않자 외지인에게 팔아버렸고, 발굴인이 아직도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

쟁기절은 그후 가짜 중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절을 지나가던 도사의 도력에 의해 절이 망하게 되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다. 1922년 발간된 운성지에 의하면 이곳 일대에는 쟁기절 뿐만 아니라 옥림사, 수성암, 백련암, 덕림사 등의 옛절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의 산세가 남달랐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김 할아버지와 자리를 함께 했던 김봉현(73) 할아버지와 서영환(61)씨도 쟁기절(장계암)터에 대한 학계의 관심과 발굴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강력히 강조하고 계셨다. 이곳은 풍수상 장차 마을 남쪽 서당안 골짜기에서 삼정승이 나올 길지가 있다고 하며 금계포란혈 등 명혈 명당이 산재해 있다고 전해 오고 있다.

현재 70여 호가 살고 있는 산덕리는 왜정 때는 120여 호가 살았다. 이 마을엔 젊은 사람은 없고 50대도 몇 명밖에 없다고 한다. 왜정 때는 운봉의 산덕, 신기, 매요, 장교, 권포 등의 다섯 마을이 100호 이상씩 살았으나 지금은 100호 이상 되는 마을이 없다. 각종 공출에 시달렸고, 주로 나락과 실탄 만든다고 놋그릇을, 그리고 가마니를 집집마다 100~150장씩 할당했다. 가마니도 등급별로 받아가서 가마니를 짜서는 표면이 깨끗하도록 겉을 잘 갈아서 공출해야 했다. 심지어는 개를 잡아 개껍질까지도 가져갔다.

당시 식량으로는 솔껍질, 보리겨, 쌀겨 등이 주식이었고 그것도 없어 굶기 일쑤였다. 김 할아버지는 강제징용을 피해 농업지도자로도 활동했다. 지금도 당산제를 지내는 이 마을은 20년 전까지만 해도 기우제를 지냈다. 마을 뒤 코재까지 오르면 제단이 있었고, 개를 잡아 제단에 피를 뿌리면 하늘에서 더럽다고 비가 내렸다 한다. 이 기우제는 인근의 고남산과 수정봉에서도 행해졌다.

여순반란사건 때는 피해가 없었으나 빨치산이 준동하면서 저녁마다 와서 양식을 털어갔다. 해방 당시 마을청년단장을 지냈던 김 할아버지는 빨치산에 잡혀 많이 맞아서 한동안 누워지내야 했다. 그래도 6.25 당시에는 마을에 70여 명의 젊은 사람이 있어 마을을 지켰다. 풍수상 명혈 덕분인지 환란 때마다 다친 사람이 없고 월남전에 나가서도 피해가 없었다.

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마치고 운봉을 떠난다. 바래봉 밑에 자리잡고 있는 운봉의 여러 마을이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런가 더 없이 평안하게 느껴진다. 남원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바래봉이 같이 따라온다. 올 봄에는 바래봉 철쭉제에 참석했으면 한다. 400여 년을 이어내려오는 운봉의 소박한 인심이 내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춘향터널을 넘는다. 인정 많던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