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마을 >>

20년 전만 해도 범을 만난 하늘 아래 첫 동네
천은사 부근 광의면 마을들 이야기

1999년 12월의 태양이 지리산 자락에 걸려 있다. 남원을 지나 구례로 향했다. 남원에서 화엄사 입구까지 올해 개통한 시원스런 도로로 밤재터널을 지나면 이내 구례로 접어든다. 지리산 온천으로 유명해지고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산동면 온천 마을 입구를 지나면 광의면이다. 이번 달에는 성삼재 횡단도로 남쪽 입구인 천은사를 중심으로 한 광의면 일대의 몇몇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세상천지가 온통 새로운 밀레니엄의 알 수 없는 흥분으로 들떠있는 도심을 뒤로 하고 찾아든 지리산 주변의 마을은 예나 다름없이 조용히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먼저 찾은 곳은 심원 마을. 심원은 구례군 산동면에 속해 있으나 지난번 산동면 방문 때 지리적으로 외딴 곳에 있어 들리지 못했었다. 심원은 전라남도에 속해 있으나 생활권은 성삼재를 넘어 다니기 보다는 전북쪽의 산내와 가까워 남원과도 친숙한 편이다.

지리산의 삼도봉은 전라남도와 북도, 그리고 경상남도가 나뉘는 곳으로, 이곳에서 전북과 전남을 가르는 경계선이 시작되지만, 산줄기를 따라 임걸령~노고단~고리봉~만복대를 잇도록 도 경계가 지나지 않고 삼도봉에서 반야봉으로 빠져 지능선을 타고 달궁계곡으로 떨어진 후 만복대로 이어진다. 그 산속의 유일한 마을인 심원이 전남으로 분류되어 있다. 따라서 심원 마을은 매우 불편한 생활상을 이루고 있었다.

천은사 입구의 매표소를 지나 성삼재를 향해 올랐다. 단풍철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차들이 시암재와 성삼재 주차장을 메우고 있었다. 성삼재 휴게소의 2층에 자리잡고 있는 지리산 성삼재분소를 찾았다. 이곳 마을 사정에 밝은 김승희(41세)분소장의 친절한 안내로 심원 마을을 둘러본다.

하늘 아래 첫 동네 심원 마을
 
구례군지에 따르면 심원(深源) 마을은 산속 깊숙한 곳에 있다 하여 그렇게 호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해발 750m의 심심산곡에 위치한 마을로, 100여 년 전부터 약초와 한봉을 사육하기 위해 한두 가구가 모인 것이 부락으로 형성되었으며, 약초와 한봉을 생업으로 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는 이 마을은 사정이 많이 변해 있었다.

5대째 이 마을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문영귀(文泳貴·59)씨를 찾았다. 부인인 이송자씨와 함께 이제는 이 마을에서 몇 명 남지 않은 토박이로서 외지인들의 도전속에 심원을 힘들게 지키고 있었다.

선친께 들은 얘기로는 일제시대부터 지금처럼 부락을 형성하지 못하고 노고단 밑부터 지금의 심원 일대까지 60여 호가 독립가옥으로 떨어져 살면서 주로 화전으로 감자를 주식으로 하며 콩 등을 갈며 살았다. 해방 후에는 성삼재를 넘어 상위 마을로 내려가 산동장에도 다녔고 험한 산길을 따라 오르내리며 구례장을 다니기도 했다.

지리산 주변 마을에서 흔했던 길쌈은 하지 않고 대신 삼씨를 내다 팔았다. 콩과 팥 그리고 어쩌다 마늘을 내다 팔기도 했다. 그후 심원은 10여 가구가 몰려 살기도 하였으나 60년대 말 무장공비가 준동하면서 김신조 사건 이후 정부의 독가촌 형성책의 일환으로 독립가옥을 이주시켜 현재의 마을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때 27가구가 정부에서 보조하는 현찰(당시 쌀 3가마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고 함)을 받고 모여 살게 되었다.

1967년 부인 이송자씨가 25세의 나이로 이곳에 시집왔을 때는 억새로 지붕을 잇고 나무를 우물 정자로 엮어 만든 윤판집에서 살았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시집온 다음해에 지리산 일대에 엄청난 비가 내려 생활터전을 잃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다. 식량 고통에 시달리며 도토리를 물에 담궜다가 보리와 밀을 섞어 밥을 해 먹었다. 지금은 사라진 호밀을 갈아 밥과 죽을 쑤어먹었고 주식은 감자였다.

1987년 12월 IBRD 차관으로 개설한 성삼재 관통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10년 주기로 마을 사람들이 흩어졌다가는 다시 돌아오곤 했다. 한때는 6가구만 남아 거의 폐촌 위기까지 몰렸었다. 마땅한 생활 대책이 없어 곤란을 겪을 무렵 지방도의 개통과 함께 88년부터 불어닥친 관광붐은 이 마을을 새롭게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심원은 현재 밭농사가 거의 없고 고로쇠물이 나오는 경첩 전후와 여름 한 철, 그리고 단풍철의 수입으로 마을 전체가 민박과 식당을 꾸려 생활하고 있다. 마을의 관광수입으로 운치있던 옛집을 허물고 92년부터 양옥으로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식수는 만복대에서 발원하는 계곡물을 집집마다 사용하고 있고 폐수는 정화시켜 계곡으로 내려 보내고 있다 한다.

20여 년 전에는 동네사람이 인근 산에서 산죽을 베다가 호랑이를 목격했다고도 전해오며 10여 년 전까지는 곰의 흔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동행한 김 분소장은 지금도 4∼5마리의 곰 흔적은 가끔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문씨는 97년 신축한 양옥에 민박방을 10개나 갖춰 놓고 오대농원이란 이름으로 식당을 겸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사륜구동차를 가지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눈이 내리면 아랫마을까지도 가지 못하고 눈이 녹을 때까지 고립되었으나 이제는 눈이 와도 관리공단과 군청에서 제설하는 덕에 겨울에도 통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문씨가 현재의 집 위쪽에 있는 곳에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보니 구들장이 나왔다 한다. 현재 마을 입구의 첫번째 집으로서 옛부터 이 마을은 많은 사람들의 생활터전으로 전출이 심했던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제 심원 마을은 긴 겨울잠을 자기 위해 채비를 하고 있었다. 몇몇 집에서는 한봉을 하며 마당 한쪽에 벌통을 놓아두고 있었다.

심원 마을을 떠나 다시 성삼재로 올라 성삼재분소에 들렀다. 김 분소장 외 7명이 근무하는 이곳은 노고단대피소도 관장하고 있다. 11월15일부터 12월15일까지는 산불방지기간이지만 노고단까지는 탐방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출입이 통제되어있는 노고단 정상은 지난 여름과 가을에 일주일에 한번씩 개방하여 계속 개방 여부에 대한 모니터링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당산제 지내는 방광리

주차장은 개인에게 임대하여 관리하고 있고, 2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던 노선버스는 11월 29일부터 내년 4월12일까지 결빙기간으로 운행이 중지된다. 특히 올해는 당일입장권 시행으로 말미암아 공단 입장료 수입은 많이 줄었으나 탐방객은 당일 입장권만 있으면 어느 매표소에서든 사찰에 내는 문화재 관람료만 더 내고 재입장할 수 있다.

구례로 내려오는 심한 경사길의 그늘진 곳에 빙판구간이 있어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천은사 입구를 지나 광의면으로 들어섰다. 광의면(光義面)은 통일신라 이후에 구례현에 속하여 방광면이라 불렸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전국적으로 지명이 개편되면서 지금의 행정명으로 굳었다.

동쪽은 마산면과, 서남쪽은 서시천을 경계로 용방면과, 북쪽은 산동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노고단에서 시작한 준령이 남서로 뻗어 내리고 그 바깥쪽으로 넓은 방광들과 하천 등을 형성하며 그 사이를 천은사계곡이 흐르고 있다. 천은사를 지나 제일 먼저 만나는 마을인 방광리로 들어섰다.

방광리는 용전(龍田), 방광(放光) 두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 중전리로 부르다가 개천에서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용천리로 개칭했고, 방광 마을은 신라 경덕왕 이후에 생긴 이름으로 방광리 앞들에 시랑이들, 객사들, 옥기들의 지명이 남아 ? 락을 이루고 살았으나 광의면 중에서도 지리산 변으로 가장 인접해 있고 또한 빈촌이었다. 농사도 적고 주로 천은사 일대의 산판에서 목재일을 하며 생활을 해왔었다.

워낙 빈곤해 마을에 학교 다니던 학생이 몇 명 없었다. 그래도 박 할아버지는 광의국민학교를 해방되던 해인 17살 때 졸업하였다. 당시에는 삼거리 부근에 10여 가구가 모여 살았었다. 일제 때는 주로 벼농사에 길쌈으로 삼베 명베(목화) 등을 생산했고, 식량이 부족하여 대부분 쑥으로 연명해야 했다. 그나마 벼와 보리를 생산하면 공출이란 이름으로 전부 빼앗아갔다.

5일마다 열리는 구례장은 마을에서 6km 정도 거리로 걸어다니거나 우마차를 타고 다녔다. 여순반란사건 때 마을이 철거되었다가 다시 형성되었으나 방광리 역시 피해를 많이 입어야 했다. 6.25 이후에는 빨치산의 습격을 피해 마을을 울타리로 둘러싸고 부락을 지켰는데, 그해 12월 대부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보초를 서던 주민 10여 명이 죽음을 당했다.

그보다 앞선 여순반란사건 때는 폭도라고 불렸던 반란군들에 각종 식량을 빼앗겼고 당시의 지주들은 그들의 고용인들에 의해 5∼6명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6.25 후에는 산에서 나오는 약초를 팔아 식량을 구했다. 현재 방광리는 천은사 입구에 위치하여 관광객이 지나는 길목이지만 민박도 치지 않고 주로 벼농사로 생업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부촌이 된 셈이라고 한다.

15년 전에 완공된 천은저수지의 물을 받아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천은사계곡의 물을 상수도로 사용하고 있으나 갈수기에는 물이 부족하다고 한다. 방광리의 특산품은 여느 마을과 달리 천은사 일대의 울창한 송림에서 나오는 송이버섯이었다. 음력 8∼9월이면 송이버섯 채취가 시작된다. 송이버섯 채취업자가 입찰을 통해 천은사 관내의 채취권을 따내면 마을사람들이 들어가 작업을 한다.

자연산 송이는 보통 때는 1kg에 10∼15만원을 호가하고 비쌀 때는 20∼25만원까지 오른다. 동네 주민들이 매일 20명씩 조직되어 하루 3∼4kg씩 약 40일간을 채취해서 업자에게 팔아 마을의 큰 소득원이 되고 있다. 송이버섯은 예사 사람에게는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솔잎을 들춰 따고 나면 하룻밤새 부쩍 커서 다음날 또 올라온다고 한다. 딴 자리는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손으로 잘 다져주어야 한다. 또한 이 마을은 산수유도 재배하는데, 올해는 산수유가 흉년이어서 600g 1근에 25,000원의 비싼 값으로 팔 수 있었다고 한다.

국태민안을 빌며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당산제는 이 마을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날짜이지만 방광리는 음력 정월 14일과 보름에 당산제를 지내며, 미리 마을의 당산나무 둘레에 빨간 흙을 1m 간격으로 넣고 새끼줄을 둘러매어 부정한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인적이 드문 때인 보름밤 11∼12시 사이에 당산신을 모시고 있다.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당산나무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방광리의 옛이름이 구전상 방괭이라고 하였다 하며 박 할아버지는 말씀을 마치셨다.

여순사건 때 소개됐던 수월리

방광리를 돌아나와 화엄사 방향으로 들어서다 길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수한 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은 수월리(水月里)에 속한 마을로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지리산 기슭으로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20여 호가 모여 살았다고 전해온다. 마을이름은 물이 차갑다 하여 물한이로 부르다가 후에 수한리(水寒里)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수한리에서 오래 사신 노인분을 수소문하여 75세의 허기(許琪) 할아버지를 만났다. 19살 때 배종려(75) 할머니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 허 할아버지는 고향이 토지면 외곡리였으나 72년 전인 3살 때 부모님을 따라 이 마을로 들어왔다. 일제 때는 9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60여 호이고 그나마 빈 집이 20여 호나 되고 혼자 사는 노인만도 10여 호에 이른다.

“왜정 때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어요.” 벼농사는 공출로 빼앗기고 조금씩 감춰두었던 식량으로 살았지만 쑥과 송구밥(소나무 껍질 벗긴 것에 쌀을 섞어 지은 밥)으로 연명했다. 수월리는 월곡, 당촌, 수한 마을이 합쳐 리를 이루고 있으나 수한 마을이 그 중 크다.

6.25 전에는 여순반란사건으로 마을 주민들이 5개월여 소개되어 살았고 반란군에 가담했던 동네 주민 몇 사람이 희생됐다. 6.25 후에는 빨치산의 피해가 말할 수 없이 심해 큰 고통을 겪었다. 수한 마을은 새마을사업 이후 당산제가 폐지되었지만 당산제를 지내던 무렵에는 마을의 당산나무 뿌리가 산속으로 멀리 뻗어나가 있어 당산제를 잘못 지내고 나면 호랑이가 나타나 발길질로 흙을 퍼붓곤 했다 한다.

마을에 관정을 뚫어 마을의 공동 식수로 사용하고 있고 농사 이외에 오이 재배와 소를 키우고 있다. 특용작물은 해봐야 빚만 진다고 말씀하시는 허 할아버지는 농가부채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계셨다. 동네는 커도 젊은 사람이 열 명 남짓밖에 안되고 대부분 노인이라며 젊은 사람들의 일손을 아쉬워하셨다. 농촌의 고령화 현상은 어느 마을이건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왜정 때는 광의국민학교에 다녔고 그후 해방이 되서야 방광국민학교가 생겼다. “왜정 때는 식량이 제일 고통이었어요”하며 허 할아버지는 큰 한숨을 쉬시며 당시를 회고하셨다.

광의면은 수많은 부락이 모여 리(里)를 이루고 있고, 부락마다 사실상 독립된 생활권을 갖고 있었다.

수한 부락을 떠나 연파리의 공북 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은 길을 사이에 두고 대전리의 상대와 하대 마을과 함께 세 마을이 모여 큰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역시 이 마을에서도 오래 사신 노인을 찾은 끝에 강삼기(姜三基·71) 할아버지를 만났다. 조부님이 이 마을로 이주하시면서 4대째 살고 있다.  

오로지 벼·보리농사만 짓는 연파리
 
공북 마을은 현재 80여 가구이나 일제 때는 130여가구가 살았다. 해방 후에는 일본이나 만주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 살면서 한때는 150여 호까지 불어났으나 생활의 어려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객지로 떠났다. 일제 때는 주로 농사를 지었고 현재의 광의초등학교에 900명 정도 다녔다. 해방이 되면서 방광초등학교가 생기면서 분교가 되어 700∼800명씩으로 갈라졌다.

식량난으로 쑥죽이나 시레기죽, 송구밥 등으로 연명했고 해방 직후에도 식량의 어려움은 계속 이어졌다. 아름드리 나무가 천은사 주변에 울창했던 무렵 마을 사람들은 천은사 소유인 절산에서 숯도 굽고 벌채 등의 산판일로 화목이나 동목을 잘라냈다. 벌채는 해방되기 3년 전까지 극성을 부렸다. 일제 때의 벌채로 산림이 황폐해졌고 그나마 남아있던 소나무들은 껍질을 벗겨 식량 대용으로 하는 바람에 많이 죽었다. 천은사 뒤의 동칭골, 어징이골이라 부르던 골짜기에서 숯을 많이 구웠고 보리타작이나 나락방아 정미는 숯을 때는 발동기를 사용했다.

구례장에서는 쌀, 보리, 소, 돼지, 닭, 염소 등의 거래가 많았고 특히 공북 마을에서는 소, 돼지 등을 키워 내다 팔았다. 옷감이 귀했던 때라 마포, 명베, 명주베 등을 직접 짜서 옷을 해 입었고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여순반란사건과 6.25를 지나면서 2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피해가 있었고 일제 징용에 끌려갔던 3명이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일제 때는 두 채의 기와집만이 있었고 대부분 초가집이었던 것이 박 대통령 당시 새마을사업을 거치면서 슬레이트와 기와집으로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뚜렷한 특산물은 없고 100% 벼농사와 보리농사를 하고 있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마을회관에서 만났던 노인들은 농가부채에 대하여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농협과 새마을금고의 농가부채가 많은 데다 보증제도 때문에 농가마다 연줄처럼 얽혀 있어 한 가구의 어려움이 곧 마을 전체의 어려움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보증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셨다.

마을 한쪽에는 면에서 가장 오래된 500년 된 당산나무가 있어 지금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었다. 섣달그믐이나 정월보름 중에 깨끗한 날을 골라 마을의 평안과 무병장수를 비는 제사를 지낸다.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무렵 정부의 강력한 권고와 군수의 만류로 당산제를 지내지 않다가 마을 아이 중 한 명이 자전거를 타다 떨어져 다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한 이후 다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제사 때는 그릇도 모두 새것으로 구입하는 등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한다.

마을회관에 모였던 7∼8명의 할아버지들은 한결 같이 일제시대 일인들의 횡포와 공출 그리고 배고픔을 이야기하고 계셨다. 강 할아버지는 이 마을 노인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야기에 열중하다보니 창밖엔 어느덧 어둠이 잔뜩 밀려와 있었고, 올려다보이는 노고단은 희미한 능선을 드러내면서 깊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많은 노인분들이 들려주신 한 맺힌 이야기는 지리산 70년의 산 역사였다. 그 얘기를 들으면 다가오는 2000년에 대한 밝은 희망보다는 왠지 가슴이 무거워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