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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사건 때 가장 피해가 컸던 마을
화엄사 아래 마산면 마을 이야기

3개 도 5개 군에 걸쳐 자리잡은 지리산 국립공원 가운데 사철 탐방객이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 화엄사 주변이다. 이번 달은 그 화엄사 입구에 위치한 마산면 일대를 둘러보기로 했다. 11월 초, 단풍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주일이라는 매스컴의 요란한 보도와는 달리 화엄사 일대의 단풍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금년은 일반적으로 기온이 높아 제때에 단풍이 들지 않았고 간혹 붉어진 잎들도 칙칙한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나마 그것이라도 보겠다고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하여 남원, 구례의 숙박업소는 주말 일찍부터 만원이 돼버렸고 어쩌다 빈방이라도 있으면 숙박료가 평상시의 몇 배를 부르고 있었다. 단풍철의 바가지 상혼이 이곳 숙박업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간신히 구례읍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식당겸 민박집 2층에 자리를 잡았다.

마산면 서쪽은 산동면과 광의면을 거쳐 흐르는 서시천이 용방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남쪽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문척면과 맞닿아 있다. 동쪽은 노고단에서 발원하는 덕은천 인근을 경계로 토지면과 접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노고단을 경계로 산동면의 일부와 마주하고 있다. 특히 마산면 서쪽을 흐르는 서시(徐市)천은 중국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러 지리산으로 보냈던 신하인 서시(원명 서복)가 건넜던 천(川)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고 있다.

이른 아침 안개가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게 깔려 있는 가운데 화엄사를 찾는 탐방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마산면 황전리가 고향이며 이곳 사정에 밝은 지리산 남부사무소 화엄출장소에 근무하는 양재진(45)씨의 친절한 안내로 마산면에 대한 소개와 몇 분의 노인분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지리산 대지진과 여순반란사건 현장

먼저 화엄사에서 가장 인접한 마을인 황전리를 들렀다. 동행한 양씨의 안내로 소병열(蘇丙烈·73) 할아버지를 만났다. 정정예(66) 할머니와 사이에 2남2녀를 낳았지만 전부 객지로 나가고 지금은 두 분만 살고 계셨다. 6대 조부님이 인근 용방면에서 황전 마을로 이주하셨다고 한다. 원래 마을 앞뜰에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오나 확인할 길이 없고 다만 지금도 마을 앞 넓은 논에서는 옛 기와장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한다.

황전(黃田) 마을은 원래 조선시대는 황둔(黃芚)이라 불렸고, 마을 오른쪽 아래에 밀양 박씨가 개척한 우전(牛田) 마을이 있었는데, 일제 때 황둔의 “황’자와 우전의 “전”자를 따서 황전 마을로 개칭하였다.

옛부터 황전 일대는 우전, 용시, 그리고 현 집단시설지구에 있었던 서촌 마을과 프라자호텔 자리에 애천 마을이 있었던 것이 일부 마을은 없어지고 합쳐지면서 황전리로 통합되었다. 특히 현재의 프라자호텔이 들어선 자리는 여러 가구가 살았으나 오래 전에 있었던 지리산 일대의 대지진으로 인하여 전원 몰사하면서 애천동(哀川洞)이라는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황전리는 일제 때 12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상가를 제외하고 136호가 살고있어 지리산 일대의 여느 마을과는 달리 인구의 유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제 당시 황전리 일대의 대부분 논밭이 화엄사 사찰 소유였고, 마을 사람들은 절땅에 소작하며 극빈한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다. 당시에는 밭이 없고 논만 있었지만 그나마 화엄사 소유의 토지가 생계의 터전이 되었었다. 마을 사람들은 식량부족으로 시달렸어도 50여 명의 스님들은 쌀밥을 먹고 살았다.

그후 자유당시절 농지개혁으로 소작하던 주민들이 서너 마지기씩 논을 소유하면서부터 일대에 사유지들이 늘기 시작했다. 소 할아버지 어릴 때는 거자수액을 채취해서 팔아 여수, 순천에서 오던 사람들이 사갔고, 산채 고사리 도토리 등을 채취하였다. 나무열매와 뿌리 등으로 연명하면서도 일제의 각종 공출에 시달려야 했다. 공출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린다는 소 할아버지는 작은 식량만이라도 공출을 피하기 위해 땅속에 묻었지만 주로 나락공출에 놋쇠 숟갈, 놋그릇, 철물 등이 남아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징용으로 끌려가 엄청나게 고생하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제 때의 고생이 한평생 살아오면서 제일 심했다는 소 할아버지의 한숨 속에서 나라를 잃었던 설움을 엿볼 수 있었다. 해방을 맞아 일제의 탄압에서 풀려나고 평온을 찾았던 지리산 주변 마을엔 여순반란사건으로 인하여 뜻하지 않은 비극이 찾아든다.

“반란사건으로 황전 마을이 제일 큰 피해를 봤을 거예요” 라며 소 할아버지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셨다. 당시 14연대였던 반란군은 구례경찰서를 습격한 후 군경에 쫓겨 야음을 틈타 황전 마을을 지나 노고단으로 도망가 버렸다. 아침이 되자 토벌군이 들이닥쳐 마을을 완전 포위한 후 집집마다 수색하여 모든 마을 사람들을 마을 앞뜰로 모이게 하였다. 당시에는 마을사람들이 좌익, 우익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좌익은 주로 머슴을 살던 사람들이었다.

초겨울 아침 동네 앞뜰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토벌군은 이중 반란군이 변장하고 주민 사이에 숨어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마을 청년 중에 깔끔한 옷을 입고 있던 16명을 끌어내어 화엄사 입구의 큰길 앞 다리 밑에서 사살하였다. 소 할아버지는 당시 아버님이 화엄사 주지로 있어 늘 단정한 옷을 입고 다녔으나 그날 아침 수색대가 소 할아버지 집을 빼놓고 지나가버리는 바람에 집합 사실을 몰랐으나 마을이 조용한 것이 이상해 밖에 나갔다가 논둑에 숨어 이 사실을 볼 수 있었다 한다. 황전 마을은 이 일로 16명의 제사가 같은 날이 되었다.

이 일이 있기 1년 전 소 할아버지가 스물 한 살 때 동네에는 좌익청년들이 많았다. 당시 화엄사 경내에 딸 둘을 데리고 살던 신씨 성의 여자가 있었고 딸들로 인해 사찰내 풍기문제가 발생해 절의 종무회의에서 절밖에 나가 살도록 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앙심을 품은 신씨의 아들들(당시 좌익)이 소 할아버지의 부친인 화엄사 주지를 끌고나가 구례읍 다리 밑에서 사살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주민 제보로 부친의 시신을 찾아 화장을 했다.

소 할아버지의 친동생은 당시 육군소위였고 훗날 예비역 육군대장까지 지낸 소준열(70)장군이다. 지금도 공산당이라면 다리가 저리다는 소 할아버지는 3주 전에 금강산 관광을 다녀오셨다. 잠시나마 이북동포들의 어려움을 볼 수 있었다고 하신다. 해방 후에는 마을 전체가 극심한 좌우익 싸움에 말렸었고, 좌익 아닌 사람들이 열 명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좌익이 우세했다. 주로 머슴이나 영세농가 사람들이 좌익의 선동에 넘어가곤 했다. 여순반란사건 때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마을 사람들의 보증인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렸으나 끝내 좌우익의 싸움속에 아버님을 잃고 말았다.

황전리는 풍수상 배의 형국이라고 전해오며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가 가라앉는다 하여 아직까지 마을에는 우물이 없고 파지도 않는다. 대신 노고단에서 흘러내리는 자연수를 간이상수도시설로 연결하여 식수로 쓰고 있다. 주 수입원이 벼농사와 그동안 개간한 밭농사였으나 6년 전 민박마을로 지정되면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들고 있다. 특히 화엄사 입구에 있는 여러 마을 가운데서도 유독 황전리 마을만이 민박을 하고 있다.

황전이 민박 마을로 지정되기 이전에는 화엄사 입구 상가 주민들과 갈등이 많았다. 저녁이면 숙박손님을 황전에서 끌어간다고 상가 겸 민박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마찰이 잦았다. 소 할아버지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이제는 민박의 간판을 붙이고 관광객을 받고 있었다. 소 할아버지도 마을 가운데 방 5개를 갖추고 ‘섬진강 민박’이란 간판을 내걸어 놓고 있다.

지금의 화엄사 매표소 오른쪽에 마을 당산나무가 있어 아직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72년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때는 이장을 맡아 마을에 공로가 많은 소 할아버지의 방엔 표창장과 감사패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인근의 마산저수지는 노고단의 물을 가두어 갑산리 일대의 넓은 논에 물을 공급하고 있으나, 화엄사 입구의 상가의 오폐수가 흘러들면서 많이 오염되고 있다 한다. 현재는 상가의 오폐수 분리하수관을 건설중이라 한다.

소 할아버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운전면허시험에 도전하여 현재 코스까지 합격하여 주행시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우 행복해 하시는 할아버지는 필기시험에 몇 번씩 떨어지며 아주 어려웠다고 한바탕 웃으셨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건네시는 소 할아버지의 한맺힌 이야기를 정리하며 황전리를 떠났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다녔던 화엄사 입구의 황전리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었다.

신라와 백제의 싸움터 정장들

황전리를 내려오다 오른쪽으로 파고들어 마산저수지 주변의 갑산리를 찾았다. 갑산리는 자연 부락 7개를 합친 마을로 갑대리와 장궁리로 이루어져 있고, 갑대리는 갑대와 대평 부락이, 장궁리는 장동과 궁산 부락이 합쳐진 것이다. 갑대리 마을 앞뜰은 신라와 백제군의 격전지로 전쟁뜰(정장들)이라 부르며, 마을 이름을 군사의 갑옷에 비유하여 갑산리라 호칭하였다가 일제 때 갑동이라 하였고, 해방 후 갑동과 대평의 첫 글자를 따서 갑대라 부른다. 장궁리는 마을 뒷산이 장막형으로 되어 있어 장동이라 칭하였고, 일제시대 궁산 마을이 형성되어 이를 합하여 장궁 마을이라 불린다.

먼저 갑산리 이장댁을 찾았다. 58세의 허태욱(許泰旭) 이장은 증조모가 이 마을로 이주해와 3대째 살고 있었다. 당초 갑산리는 창녕 조씨와 장씨가 이주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며, 약 150여 년 전에 현재의 마산저수지를 큰 방죽거리, 그리고 지금은 흔적만 있는 마을 어귀의 작은 저수지 자리를 작은 방죽거리라 불렀다.

갑산리에는 상당히 넓은 논이 있는데 이 벌판을 정장들이라 부른다. 삼국시대 토지면 섬진강가에 위치한 석주관 지역의 신라군이 장동 지역의 백제군을 공격해 앞뜰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자리라고 한다. 노고단이 바로 올려다보이는 갑산리는 현재 31호로 허씨와 조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민박은 하지 않고 농사가 생업이다. 옛부터 마을 가운데 큰 우물이 있어 동네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혼자 사시는 노인분이 많다며 허 이장이 걱정을 한다. 갑산리는 농사 외에 오이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구례 전체 600여 농가가 오이를 심고 있고 토질이 알맞아 맛도 좋고 특히 선별을 잘해 전국에서도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20kg 한 상자가 20,000원 정도에 전국으로 팔려 나가며, 특히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서도 구례 오이는 그 품질을 알아 준다고 한다. 올해 벼농사는 심한 태풍으로 벼가 많이 쓰러졌으나 평년작은 될 것 같다고 한다.

허 이장의 소개로 100여 년째 갑산리 장궁 마을에 살고 계신다는 박창용(朴昌墉·74) 할아버지를 만났다. 유순예(71) 할머니와 사이에 6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박 할아버지가 사시는 마을은 갑산리 중에서도 아홉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새뜸 마을이다. 건너편 갑동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84년 전 마을 전체가 큰불이 나면서 현 위치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조부님이 동학란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오셨다. 마산저수지는 74년 전 공사를 시작하여 4년만에 완공되었다. 어릴 때는 저수지 근처에서 물놀이를 즐겼고 땅따먹기, 비석치기 놀이를 했다며 옛일을 회고 하셨다. 이 마을에는 정씨와 손씨 등의 부자가 살았다 해서 정장자, 손장자란 지명이 전해 오고 있다. 특히 마을 가운데의 자연 우물에서 물이 너무 잘 나와 옛부터 마을에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고 한다.

추수가 끝난 텅빈 논에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리밭을 갈았으나 이제는 극히 일부만 보리를 심고 젊은 사람이 없어 보리 농사도 못하고 있다. 신축한 2층 양옥에 살고 계시는 박 할아버지는 날로 고령화돼 가는 농촌의 인구에 비례해 농사가 점점 줄어가고 있다고 걱정하고 계셨다.

“들어와 살면 부자 되는 좋은 터”

갑산리를 떠나 큰길 건너편 청천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마산리로 내려왔다. 마산리 역시 화엄사 진입로의 큰길 가에 있지만 민박마을은 아니다. 마산리의 지명은 신라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선국사가 사도리 앞 강변에서 마산리 뒷산의 형상을 보니 흡사 말(馬)과 같이 생겼다 하여 마산리로 이름지었다. 이 마을은 청주 곽씨가 처음 정착하여 터를 잡은 후 고종 임진년(1892년)에 전주 이씨가 하사 마을에서 이주한 것을 비롯하여 의령 남씨가 낙안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산면에 속한 청내 마을이 현 과수원 근처에 큰 부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여순반란사건 때 폐촌되었다.

마산리에서 장궁리로 가는 중간에 장군목이란 지명의 고개가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원군으로 왔던 이여송 장군이 마산리 뒷산의 산세가 너무 좋아 큰 인물이 나오면 훗날 명나라를 넘볼까 두려워 산맥을 파헤쳐 끊어버렸다고 하여 그 후로 장군목으로 불렸다 한다. 집집마다 오래된 돌담으로 둘러싸인 이색적인 마을을 다니며 수소문한 끝에 박경호(朴敬鎬·80)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21세 때 조원예(74) 할머니와 결혼하여 7남매를 낳아 길렀으나 지금은 역시 두 분만이 살고 계셨다. 두 분만 사시는 노여움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앉자마자 말문을 여신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졌지만 자식이 부모를 안 모시려고 해요”. 현재 이 마을은 60대 미만이 몇 안되는 고령 마을이다. 동네 지형이 말의 형상이다 보니 인근 지명도 마부, 말구유 등의 명칭이 있었다.

5대 조부께서 생활이 어려워 살길을 찾아 마산리에 정착케 되었다. 일제시대는 인근의 청내 마을까지 합쳐 150여 호가 살았었으나 여순반란사건 때 빨갱이가 많이 산다고 철거해 버려 지금은 마산리로 합쳐졌다. 일제 때는 벼농사가 생업이었지만 명베를 짜서 옷감을 자급자족했다. 마을 사람들은 의용군이다 보국대다 해서 끌려나가고 남은 가족들은 산속을 헤매며 칡껍질, 뽕나무 껍질 등을 벗겼다. 관솔을 채취하며 모진 식량고통을 받았다.

옆에 계신 할머니가 한 마디 거드신다. 남편은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고 자식들과 산에서 소나무 껍질 벗겨 밥을 해먹을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당시 생각만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난다고 하셨다. 남편이 없으니 작은 며느리였던 할머니가 시부모를 모시면서 공출 할당 나온 가마니를 시아버지와 함께 짰다. 보상이라고는 1∼2되의 쌀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어쩌다 지급됐다.

“일본사람들이 독했어요 그런데 일본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일본사람 밑에서 일했던 한국 사람들이예요. 오죽 했으면 해방 이듬해 화엄사 입구의 터널을 이룰 정도로 무성했던 벚나무를 왜놈나라 국화라고 다 베어 버렸겠어요.”

할머니의 일제에 대한 노여움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박 할아버지는 25세가 되면서 징용을 당해 일본 나고야로 건너갔으나 엄청난 폭격으로 인해 한 달만에 동경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는 비행기 부품조립공장에서 일해야만 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서야 귀국했다.

일제 때는 화엄사 외에는 인근에 절이 없었고 마을 전체에 초등학교 나온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틀을 꼬박 일해서 장작 한 짐을 만들면 지게에 지고 구례장에 나가 생필품을 사오곤 했지만, 장작 한 짐에 쌀 한 되의 가격이었다. 박 할아버지는 여순반란사건 때 마산리가 제일 피해를 봤다고 말씀하셨다. 여순사건 후 마을 청년 150여 명이 잡혀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피해 상황은 더 이상 자세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을 전체에 80세 되신 박 할아버지의 동갑이 한 명도 없다고 했다.

현재 150여 호 되는 마산리는 외지인이 50% 정도이고, 외지인은 주로 숙박업이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옛부터 마산리는 터가 좋아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는 소문이 나있어 꾸준히 외지인이 들어오고 있다 한다. 여순반란사건 때는 마산리가 반란군과 토벌대의 경계선으로 마산리에 있던 지서가 반란군을 피해 아랫마을인 냉천리로 옮겼다.

넓직한 박 할아버지의 집뜰에는 산수유나무, 감나무 등이 있고 마당에선 산수유의 빨간 열매를 말리고 있었다. 집에서 딴 거라며 건네주시는 연시 2개는 점심식사를 거르고 있던 차에 훌륭한 식사 대용이 되었다. 사진을 찍겠다고 했더니 어느새 한복을 입고 나오시는 할아버지는 80세 답지 않게 정정하셨다. 두 분의 건강을 기원하며 돌담집의 마을을 돌아나왔다.

남한에서도 몇 손가락에 드는 큰 마을

마을 어귀에선 흐르는 시냇물에 할머니 한 분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동네 한쪽엔 아직은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더 아래로 내려온 곳에 냉천리가 자리잡고 있다. 냉천리는 구례에서 하동으로 이어지는 19번 국도에서 화엄사로 향하다 첫번째 왼쪽으로 만나는 마을이다. 냉천리(冷川里)는 중국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지리산으로 보낸 서시라는 신하가 이곳 마을에 이르러 샘물을 먹어보니 매우 차므로 찬 샘이 있는 곳이라 하여 그후로 냉천리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냉천 마을의 형성시기는 확실한 고증이 없고 삼국시대 불교 전성시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구전된다. 전설에 의하면 냉천리 남쪽에 당산할매, 북쪽에 당산할아버지라 부르는 큰 정자나무가 있는데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 풍년과 마을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봄에 이 정자나무의 잎이 일제히 고르게 피면 그 해는 풍년이, 고르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추천해 준 81세의 이종호(李鐘浩) 할아버지를 만났다. 최일순(75) 할머니와 역시 두 분만 살고 계셨다. 4남1녀의 자식들은 전부 객지로 나갔다. 임진왜란 때 조상이 남원으로 오셨다가 5대 조부께서 이 마을로 들어오셨다. 일제 때 이 마을은 남한에서도 몇 손가락에 들던 400여 호의 큰 마을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가 주업으로 남의 땅을 일구는 소작농이었다.

특히 이 마을에는 만석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대궐 같은 큰 집에 살고 있었고 수십 가구가 그 밑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당시 만석꾼은 일제시대인데도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을 통합한 농민독본이란 책으로 비밀리에 마을사람들을 가르치곤 했다. 민가 대부분이 조그만 오두막집 형태를 이루며 붙어 있었다.

이 할아버지의 생애는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인도네시아로 끌려가면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해방 후 연합군에 의해 잔무 정리원으로 남아 있다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고 무랑루즈라 불리던 소극장에서 소품(희곡)이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극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1년 귀국해 부산에 문화협회 간판으로 공연했으나 실패 후 고향인 구례로 들어왔다.

현재는 할아버지의 문학적 재능을 살려 40여 년 전부터 냉천리 마을회관 내에 충효교실을 열어 초중고 학생을 상대로 여름과 겨울방학을 이용해 상용한자 공부를 자비로 가르치고 있다. 농사일을 잘하지 못해 시작했다는 충효교실은 냉천리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한국 제일 장수촌  사도리

냉천리를 내려와 마산면 동쪽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사도리로 향했다. 사도리는 상사와 하사 부락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마을 입구에 ‘한국제일장수촌 기념비’라고 적힌 큰 비석이 서있는 마을로 접어들었다. 상사 마을의 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이름의 유래로 보아 신라 흥덕왕(827년) 시대부터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해주 오씨와 영천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마을 앞 강변에서 우연히 이인(異人)을 만나 세상사를 물어 보았던 바 이인은 말을 하지 않고 모래 위에 삼국도를 그려 삼국통일의 징조를 암시해 주어 도선이 이를 크게 깨닫고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창업에 큰 공을 세웠다. 후세사람이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렸다 하여 사도리(沙圖里)라 불렀으며 일제 때 상사리와 하사리로 분동이 되었다.

상사 마을 입구엔 당몰샘이라 불리는 유명한 샘이 있다. 일부러 찾아가 마셔본 당몰샘은 정말로 깨끗하고 물맛이 좋았다. 물이 좋아 장수촌이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떠간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16대째 살고 있다는 오용수(71) 할아버지를 만났다. 일제시대부터 생업이 농사인 이 마을은 110여 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60여 호로 줄었다. 오 할아버지 역시 일제 때는 식량이 없어 제일 고통을 겪었다. 산에는 소나무가 많아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고 봄에는 쑥을 뜯어다 삶아 먹었다. 인근의 청천소학교는 4학년 밖에 없다가 나중에 6학년까지 생겼다.

15세 때 11회 졸업생이 되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일제는 강제로 학생들에게 지독한 훈련을 시키곤 했다. 그 훈련이 싫어 학교에 안가면 당시 조선인 선생이 붙잡으러 오고 학교 안 온 학생들을 둘씩 세워놓고 서로 패라고까지 시켰다. 한 교실에 45명이 공부했다.

젊은 청년들은 징용이나 보국대로 나가 많은 사람들이 일본탄광으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 부락엔 노인들이 대부분이고 부락 인구의 연령 분포상 80∼90세까지의 노인이 많다고 해서 한국 최장수 마을로 선정되었다. 현재도 98세 되신 할머니가 살아계시며 평균 80∼90세 넘어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마을은 특별한 특산품이 없지만 앞날을 내다보며 주변 산을 개간해서 차나무를 많이 심었으나 아직은 차잎을 따기에는 이르다고 한다. 민박마을도 아니고 완전히 농사에만 의지하는 우리 농촌의 전형적인 마을이었다. 당몰샘 뒤에 자리잡은 오 할아버지의 댁은 오래된 고가로 한여름 무성했던 파초의 파란 잎새가 돌담 너머로 삐쭉이 나와 있었다.

상사 마을을 돌아 나오며 마산면을 벗어난다. 지리산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애환이 담긴 그런 산이다. 그러나 많은 사연들이 점점 지워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귀로에 올랐다. 단풍 관광에 나섰던 차량의 행렬이 국도에 한꺼번에 몰리면서 갑갑한 귀경길로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