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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어려운 사람들이 머문 마지막 마을
산청군 필봉산 아래 향양리·수철리·지막리 이야기

천왕봉 북동쪽, 만수천이 함양군을 벗어나면서 엄천강으로 이름을 바꾸고 산청군으로 접어들어 첫째로 만나는 곳에 금서면이 있다. 인월을 지나 만수천과 엄천강을 지나는 마을마다에는 철이른 가을 꽃들이 피어나고 탐스러운 감이 지천으로 열려 있다. 얼마 전 태풍으로 큰 피해를 보았던 밤나무도 이젠 제법 영글었다.

지리산 주변의 5개군 중에서도 산청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仇衡王·일명 양왕 讓王)의 능이 있고, 유명한 왕산(王山)과 필봉산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달에는 그 양왕릉 주변의 마을을 살펴보기로 했다. 가을을 재촉하는 굵은 빗줄기가 지리산 전역에 쏟아지고 있었다. 먼저 구형왕릉부터 들렸다.

동네 도랑에서도 철조각 주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마침 구형왕릉 앞의 덕양전에서는 참봉 취임식이 열리고 있었다. 찾아보고자 했던 구형왕릉 주변의 화계리(花溪里)와 자혜리(自惠里) 등의 대부분 노인들이 참봉 취임식에 구경차 나가 있어 온 동네가 비어 있었다. 힘겹게 찾아 만난 마을 이장도 행사에 참가한다며 휑하니 가버린다. 쏟아지는 빗속에 발길을 돌린다.

산청군 금서면 중에서도 지리산 깊숙이 자리잡아 좀처럼 들리기 어려운 향양리(向陽里)와 수철리(水鐵里), 그리고 지막리(紙幕里)로 향했다. 이 마을들은 왕산(王山)과 필봉산 바로 남쪽에 위치하여 지리산 주변의 또 다른 관광지로 알려진 마을이다. 먼저 수철리로 들어섰다. 수철리는 50여 호 되는 그리 크지 않은 부락이었으나 조그만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철 부락과 가재 부락으로 나뉘어 있다.

이 마을 한쪽에서 마을 구판장을 하고 있는 진신탁씨(陳辛鐸·50)를 만났다. 200여 년동안 6대를 이어 살아온 그가 선조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렇다. 수철 마을은 오비 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정말로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들어와 머무는 마지막 마을이란 뜻이라고 했다. 일제 때부터 마을 인근에 철광산이 많았고 지금도 광산이 있다. 진씨 어릴 때는 동네 도랑에서 철 조각을 주우며 놀았다고 한다.

산청군은 85%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6.25 이전부터 참나무숯을 많이 구웠다. 마을 대부분의 토지는 몇몇 지주가 독점했고, 옛날에는 조상이 돌아가셔도 묘자리 하나 쓰려해도 지주의 눈치를 보아가며 썼기 때문에 조상들의 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고 한다. 선친께 전해들은 바로는 일제 때 산청주재소에 근무한 일본순사 3명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했고, 현재보다 많은 80여 호가 주로 숯을 굽고 화목을 해다 시장에 내다팔며 연명했다. 그래도 금서면은 산청군에서 논이 제일 많아 주민 85%가 논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나물 외에는 별다른 특산물이 없고 밭작물로는 주로 깨, 콩, 고추, 배추, 무 등을 재배하고 있다.

수철리에서 가재 마을 앞을 지나 10여 리 산속으로 파고들면 오봉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현재 4가구가 모여 논밭을 일구며 살고 있으나 6.25 전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오봉은 물이 좋고 특히 수석이 유명하여 전국에서 수석 수집가들이 몰려온다고 한다.

6.25 때는 먹을 것이 없어 가재 마을로 내려와 빨치산으로 위장하여 마을 사람들을 해치고 식량을 약탈해 갔다. 이로 인해 토벌대인 3연대가 들이닥치면서 오봉 사람들을 붙잡아 수철리 마을 창고 앞에서 처형하는 비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수철리 일대는 빨치산의 주요 루트여서 경상남도는 빨치산 루트 관광로를 이 마을로 연결해 놓고 이미 공사 발주를 끝냈다고 한다. 산청군내에는 오봉, 화개, 쌍계 3곳에서 6.25 전후 숱한 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진씨가 초등학교 다니던 무렵에는 호랑이가 산청에 자주 출현했고, 아직도 곰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곰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를 꺾어서 가지 위에 올려놓고 잠을 자기 때문에 쉽게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얼마 전 지나간 태풍으로 비는 많이 오지 않았으나 심한 강풍이 몰아쳐 감나무, 밤나무, 고추 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마을 식수는 산골짜기에서 공급하고 집집마다 수도시설을 하여 받아쓰고 있다. 수철리는 오랫동안 지리산 주변의 다른 마을과 달리 관광객을 받지 않아 계곡이 깨끗하고 골짜기의 물이 오염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살아오는 사람 외에 외지인이 거의 없고, 주민 40대까지는 인근 마을사람끼리 결혼하여 살아왔다. 그런 까닭으로 생활방식이 거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수철과 가재 마을은 한 부락이면서도 조그만 개울 하나를 두고 옛부터 노인들의 사소한 감정싸움이 번져 3년 전부터는 당산제도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진씨는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 제일 고생했고, 70년대 초반까지는 밥을 거의 굶다시피 하며 지냈다고 한다. 건너편 마을인 향양리에서 오르는 왕산과 필봉산에는 약 4시간 코스의 등산로가 잘 나있어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건너편 멀찌감치 떨어진 웅석봉은 8시간이나 되는 등산길로 하루를 잡아야한다고 알려 준다.

진씨는 이야기를 끝내며 수철리 일대는 아직도 환경오염이 안된 곳으로 깨끗한 자연환경을 보려면 이곳으로 오라고 자랑삼아 이야기를 했다. 진씨는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시원스레 펼쳐진 마당 한쪽에서 마을 구판장을 차려 생업을 잇고 있다.

사기그릇을 만들던 마을

인근의 향양리(向陽里)로 향했다. 향양리는 구사촌과 새터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먼저 필봉산 바로 아래의 구사 마을부터 찾아 올라갔다. 역시 이 마을에서 6대째 살아온다는 고창석(高昌錫·69) 할아버지를 만났다. 인근 대부분의 노인분들은 200여 년 전에 그들의 조상이 이곳에 정착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있다고 하여 이 일대의 마을 형성에 대한 개략적인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23세 때 당시 18세였던 김순남 할머니와 결혼하여 1남8녀를 낳았다. 선조께서는 어려운 살림 속에 살길을 찾아 하동에서 이곳 지리산 속으로 이주하여 왔다고 한다. 구사 마을이란 이름은 60여 년 전 인근에서 사기그릇을 많이 구웠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 주변에는 백토가 나오는 광산이 3곳이나 있고, 왜정 말기까지는 사기그릇을 구워서 지금도 사기그릇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구사촌 밑은 신사촌이란 마을로서 사기그릇을 파는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도 왕산 밑에는 백토가 많이 나오고 있다. 고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에는 20여 호가 논밭농사를 하며 살았고, 못사는 살림 속에 일제의 각종 공출마저 심해 놋그릇 등은 아예 가지고 있을 엄두도 못냈고, 조금씩 나오던 나락은 산속의 덤불 속에 감춰 놓았다가 몰래 가져다 먹어야 했다. 공출 독촉을 심하게 받곤하여 광솔을 따와 기름을 짜야했다.

지도상 쌍재라 표시된 골짜기는 구사촌에서 2km 산속으로 들어간 곳으로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나 일제 때는 숯굴이 많았다. 구사 마을 밑 평촌 마을에는 일제 때 초등학교가 있었고, 고 할아버지는 이 학교 1회 졸업생이다. 1회 때 33명의 졸업생이 나왔고, 20회 때까지만 해도 1,000명 이상의 졸업생이 나왔으나 학생이 점점 줄면서 올해 9월1일로 학생이 50명 미만이라 폐교됐다. 지금은 교육청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산청읍내의 초등학교 버스가 이 마을 학생들을 등하교 시켜주고 있다.

마을 뒷산인 필봉산에는 절이 있었다는 절터가 남아 있고, 무제터라 하여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 있다. 이곳에 군수가 기우제를 지내러 오면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나가 밝혔다. 일제 때는 6km 떨어진 산청장을 다녔으나 길이 없어 개울을 따라 왕래했다. 마을 밑까지 버스가 들어온 것이 7∼8년밖에 되지 않는다.

70년대 초반인 30년 전에 전기가 마을에 들어왔다. 해방되면서 이 마을에도 좌우익의 싸움이 심했다. 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빨치산으로 나갔고 이 와중에 고 할아버지의 큰아버지는 재산이 좀 있어 잘 살았으나 머슴하던 사람들이 빨치산에 합류하면서 큰아버지를 붙잡아간 후 소식이 끊겼다. 또한 마을 청년단장을 했던 고모부가 고모와 함께 붙잡혀가다 마을 뒷산에서 죽었고, 여러 사람이 행방불명되었다.

고 할아버지가 열 아홉 되던 해 6.25가 나면서 인민군에 잡혀 의용군으로 고성까지 나갔으나 한 달만에 탈출하여 마을 뒷산에 은신하며 살았다. 이를 전해들은 어머니가 집나간 소를 찾는 체하며 산으로 올라와 식량 등을 주고 가곤 했다. 고 할아버지의 60세 된 여동생이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며 한 마디 한다. 당시에는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해지면 빨치산들이 내려오는 구둣발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한다.

구사 마을은 현재 33가구로 주로 논농사와 배나무, 밤나무, 토종벌을 키우고 있으나 이번 태풍으로 배는 80% 이상이 떨어져 버렸다. 일제 때 사기그릇 굽던 굴에 들어가 놀던 기억이 있고 굴 안이 시원하여 항상 놀이터로 삼았다고 한다. 필봉산은 이름 그대로 쳐다보기에도 펜촉처럼 뾰족하게 솟았다.

고창석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마치고 구사촌 밑 새터 마을로 내려왔다. 새터 마을에서는 수소문 끝에 연세가 많으신 89세의 고술봉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시고 58세의 둘째아들 내외와 같이 살고 계셨다. 사형제를 키웠으나 큰아들과 막내아들은 군에서 각각 전사와 병으로 죽었다. 그나마 같이 사는 둘째아들이 객지로 나간다는 것을 붙잡고 있다며 한탄을 하신다.

고술봉 할아버지는 구사 마을의 고창석 할아버지와 친척간이었다. 고 할아버지의 조부께서 구사 마을에서 살다가 새터 마을로 내려와 처음으로 집을 짓고 사셨다 한다. 일제 때는 외지인이 들어와 숯을 구우면 동네사람들이 일을 해주고 40∼50원의 저임을 받았다.

조부님이 처음 새터로 이주하였을 때는 마을 전체가 밭이었고, 그 후 조금씩 개간도 하고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지금은 23호로 늘어났다. 대부분 논농사를 주업으로 하나 밤나무가 많아 밤이 많이 나온다. 새터 역시 태풍 피해가 심했다.

고 할아버지는 20대에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7∼8년간 목장에서 일했다. 일제 때는 시오리 길의 산청장에 다녔으나 물건도 별로 없고 장도 작았다. 주로 산에서 화목을 해다 장작으로 팔았고 살림에 긴요한 물건이나 고기 등을 사오곤 했다. 당시의 장터는 점포가 없이 주로 지게에 물건을 지고 와 지게채 길거리에 세워 놓고 물건을 흥정했다. 삼천포에서는 여러 날 걸려 소금을 짊어지고 산청장까지 팔러 왔다.

20여 리 떨어진 곳에 초등학교가 있었으나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학교는 아예 엄두도 못냈다. 이 마을은 일제시대부터 이 박사 때까지 누에를 많이 키웠으나 정부의 수매가 끝나면서부터 키우지 않게 되었다. 6.25 전후 해서는 반란군과 빨치산이 들어오면서 7∼8년간 아랫 마을로 소개되어 살았다. 지금은 마을 전체가 소를 많이 기르고 있어 30여 마리나 키우는 집도 있고, 고 할아버지는 3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사료는 주로 논에서 나오는 짚을 먹인다고 한다.

새터 위 골짜기에는 대밭이 무성해 대밭골이란 명칭이 붙었다. 고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비교적 잘 살던 원지쪽 부자들의 논에 소작을 해서 살았으나 그 후 논을 조금씩 나눠 팔아버리는 바람에 소작농마저 잃어 버려 큰 고생을 하며 살아야했다. 주위에는 보리밭도 많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마치며 사진을 찍겠다고 했더니 허름한 옷을 깨끗한 삼베옷으로 갈아입으시며 말씀하신다.

“지난해 봄 돌아가신 할머니가 손으로 직접 짜서 입으라고 하더니 만들어 놓고는 먼저 가버렸어요. 더 이상 무슨 말이 있겠어요. 평생 고생은 말도 못해요. 이젠 곧 죽을 거요.”

고 할아버지와 대화를 마치며 무거운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왔다. 10년도 지나기 전에 지리산 주변의 대부분의 마을은 자식들마저도 떠나버리고 노인들만 지키는 마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섰다.

새터를 떠나 제법 큰 길이 있는 향양리 마을로 내려왔다. 이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다는 93세의 송점순 할머니를 찾았다. 할아버지는 타계하시고 66세의 아들과 함께 살고 계셨다. 93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논밭일을 다니신다고 한다. 청력이 약간 떨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건강에 이상이 없으시다고 한다. 고향이 새터 마을인 송 할머니는 16세때 결혼하여 7남매를 낳아 길렀다. 마침 부산에 산다는 작은아들 가족이 승용차로 벌초 겸 고향나들이를 왔다가고 있었다.

큰아들은 군에 나가 전사했다고 한다. 일제 때는 논밭농사를 했으나 강제 공출량을 채우느라 하루종일 소나무껍질 등을 벗기러 다녔고 식량이라고는 대부분 쑥으로 연명했다. 어쩌다 마을에서 콩깻묵 등이 나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멧돼지가 마을까지 내려와 피해를 입혔고, 산에서 도토리를 주어다 먹었다. 일제 때는 누에를 많이 쳤고 지금도 누에를 기르는 집이 남아 있다고 한다.

6.25때의 고생하던 많은 기억조차 지금은 거의 잊어버렸다며 자세한 말씀을 하지 못하셨다. 송 할머니의 깊게 파인 주름살만이 90년을 넘게 살아온 지리산의 깊은 사연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래 이야기하는 것이 실례될 것 같아 이야기를 접었다. 오래 사시는 비결이 어릴 때 많이 드셨다는 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며 발길을 돌렸다. 향양리 마을도 소를 많이 키우고 염소도 키우고 있었다. 2차선 포장도로 큰 길가에 동네 주민들의 승용차가 늘어서 있다.

의용군과 국군에 복무한 류 할아버지

향양리와 수철리, 그리고 지막리는 서로 멀리 건너다보여 언뜻 보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같다. 날이 어두웠다. 지리산 북쪽으로 답사 여행하면 늘 백무동 느티나무집의 문호성씨 집에서 머물렀다. 느티나무집 옆의 백무계곡에는 밤새 계곡 물소리가 진동한다. 많은 등산객이 머물다 새벽녘에 천왕봉으로 향했지만, 쏟아지는 빗줄기에 걱정이 앞선다. 밤새 술타령을 하던 중년의 등산객 서너 명도 천왕봉으로 떠났다. 무사히 하산하길 빌며 다시 금서면을 찾아 지막리로 올라갔다.

이 마을 사정에 밝다는 류재근(柳在根·68) 할아버지를 만났다. 노필호(63) 할머니와 사이에 5남매를 두셨다. 4대째 지막리에서 살아오신다고 한다. 현재는 50호 미만의 가구가 살고 있으나 일제 때는 많이 살았다고 한다. 지막리 위에는 천광사란 절이 있었다는 절골이 있고, 사동이라 불리는 배암골이 있었다.

지막리 바로 위 중촌 마을은 지금은 한 집밖에 살고 있지 않지만, 일제 때는 구장이 있었을 정도로 사람이 많이 살았다. 지금은 벼농사와 밤나무가 생업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류 할아버지 14세 때 해방이 되었으나, 1941년 12월4일 대동아전쟁이 나면서 한 집에 몇 근씩 광솔기름을 내라고 규정해 놓고 왜놈 순사가 와서 다그치곤 했다. 당시 주변엔 나무도 많지 않았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끼니도 어려웠고, 비가 오지 않아 소나무가 말라죽기도 했다.

“식량은 주로 공출로 빼앗기고 소나무 껍질 함부로 벗기다 걸리면 벌금을 내야 했고, 참 못살았어요”

류 할아버지의 이 한 마디가 일제 때 지리산 사람들의 생활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식량으로 하던 쑥도 귀해 산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일제 때는 산청장에 나가면서 산에서 싸리나무를 베어다 삼태기 등 싸리제품을 만들어 장에 내다팔았다. 류 할아버지는 올해 폐교된 매촌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고창벽 할아버지와 동창이었다.

일제 때는 초가집조차 짓지 못하고 가마니 짜서 둘러치는 움막을 짓고 살았다. 잘 사는 사람들은 그나마 나무기둥에 볏집을 엮어 집을 지었고, 못 사는 사람들은 억새를 끊어다 엮어서 지붕을 이었다. 26세가 되어서 결혼한 류 할아버지는 해방 후에도 못 사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마을 골짜기마다 화전으로 개간해서 잡곡을 심어 먹었다.

여순반란사건이 터지면서 당시 좌익의 준동이 심했고, 그후 보도연맹 가입자는 총살을 당했으나 지막리만은 그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6.25사변 때는 의용군으로 나가 인민군 부대에 편입되어 전주까지 갔었으나, 삼장에 주둔하게 되면서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국군에 22세에 입대하여 26살까지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왔다.

6.25 후에는 지리산 나무를 베어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산림이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지막리는 아직까지 당산제를 지내고 있었다.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비는 당산제는 음력 정월 1일 밤 12시에 모신다. 지막리 인근에는 안심사란 절이 있었다는 안심골이 있다. 이 마을은 이웃 마을과 달리 가축을 별로 기르지 않고 있었다.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별로 들어오지 않아요”라며 류 할아버지는 걱정하셨다. 비가 계속 퍼붓고 있었다. 이 비는 농사에 좋지 않다고 걱정하는 류 할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금서면을 떠났다.

귀로에 밤머리재를 지나 잠시 지리산 동부관리소를 찾았다. 부임한 지 2개월 된 김영기 소장이 반갑게 맞는다. 김 소장은 국립공원관리공단 본부의 운영부장을 맡았었기에 구면이었다. 작년의 수해와 인명피해를 계기로 올해는 작년 못지 않은 비가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철저한 등산객 통제와 대피, 그리고 수방시설로 단 한명의 피해자도 없었다고 한다. 김 소장은 이제 곧 닥쳐올 가을맞이 탐방객들의 안전관리에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하였다. 부임 2개월 동안에도 수십 명의 조난자가 발생하여 직원들이 밤낮으로 구조활동에 여념이 없었고 항상 긴장속에 보낸다고 고충을 털어 놓았다.

이곳 지리산 동부쪽에도 북쪽의 엄천강변과 같이 식수전용 댐을 만든다 하여 반대하는 깃발이 길가에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비가 내리는 섬진강변을 달려 하동에서 구례쪽으로 접어들었다.

얼마 전 경상남도 도청의 지리산 빨치산 루트 개발담당자와 나눴던 이야기가 귀에 맴돈다. 관광목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옛 지리산 빨치산 루트로 몰려오는 관광객을 바라보며, 아직도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오시는 지리산 주변의 많은 노인분들께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걱정스러웠다. 많은 할머니들이 내 남편, 내 자식이 아직도 이유 없이 희생을 당했다며 명예회복을 바라며 절규하고 있었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무거운 숙제를 안고 있기에 더욱 무거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