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마을 >>

절이 들어서면 밑에 마을도 생겼다
마천면의 등구사와 금대암 아래 마을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속의 촌거(村居)는 승사(僧寺)와 섞이어 산다. 스님이나 속인이나 대나무를 꺾고 감과 밤을 주어서 살아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 풍족하다. 이런 까닭으로 이 산에 사는 백성은 풍년과 흉년을 모르고 지내므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라고 지리산에 대하여 적고 있다. 지리산은 광대하고 넉넉한 품으로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을 그 안에 너그럽게 포용하고 있다.

지리산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산속에 무수히 산재해 있던 절을 중심으로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절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절을 중심으로 사하촌(寺下村)이 생겨 나면서 절이 촌락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번 달은 등구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마천면 촉동 마을과 등구, 창촌, 그리고 금대암과 안국사 주변의 당흥, 금계 마을을 찾았다. 인월에서 만수천을 따라 마천에 이르는 임천강 위에도 4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히 내려 앉아 지나는 마을 마다 담장 사이로 노란색 산수유와 개나리가 만발해 있었다. 지리산의 봄은 노란색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임천강을 따라 의탄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는 추성리를 지나 칠선계곡으로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창원리를 지나 구양리, 그리고 오도재를 오르는 길을 만나게 된다. 구양리 맨 위쪽에 위치하여 오도재를 오르는 길목에 자리잡은 촉동 마을부터 찾았다.

마천향토지 집필위원을 하여 이곳 사정에 두루 밝은 백무동 느티나무집의 문호성씨와 동행할 예정이었으나 마침 이 날은 백무동 주민번영회에서 백무동매표소에서 주차장까지 4km에 이르는 도로에 벚나무를 심기로 약속된 날이란다. 주민들의 성금으로 마련된 벚나무를 올해는 1km 구간에 심고 내년까지 총 600그루를 심을 계획이란다. 내년부터는 쌍계사의 벚꽃터널과 함께 백무동 진입로가 지리산의 벚꽃 명소로 등장하게 될 것 같다.

촉대봉 아래 마을 촉동

촉동 마을에서 4대째 살아오신다는 김쌍수(金雙守·76) 할아버지를 만났다. 김복남(75) 할머니와 사이에 딸 넷 아들 둘을 두셨으나 전부 객지로 나가고 두 분만 살고 계셨다. 증조부님이 이 마을로 들어오셔서 다래넝쿨을 걷어내어 밭을 만들고 산에서 나무를 잘라 윤판집을 엮어 살았다.

김 할아버지가 부친께 들은 얘기로는 이 마을은 옛날에는 논이 없었고 화전으로 일군 밭에서 감자, 조, 콩, 팥 등을 생산하여 주식으로 삼았다. 현재는 23가구지만 당시에는 서너 가구가 살았다 한다. 주변의 울창했던 산림은 옛날만 못하지만 현재도 소나무, 참나무, 고로쇠나무가 많다.

선친의 교육에 대한 깨우치심이 남달라 김 할아버지는 7살 때부터 동네 서당에 다녀 8년간 한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한학을 마친 후에는 2년간 일본 동경에 있던 농림중학에서 농사일과 나무에 대해 공부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농사일을 지도했고, 일제 말기에는 일본 해군으로 영장이 나와 필리핀까지 갔으나 도착 당일 해방이 되어 극적으로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제 때는 마천장이 없어 오도재와 지안재를 넘어 30여 리 떨어진 함양장까지 나가 가축과 소금 등을 사왔다. 집에서 기르던 돼지새끼를 지게에 짊어지고 함양장에 내다팔았다. 당시에는 마을 대부분이 담배농사를 했고 김 할아버지도 96년까지 경작했다. 촉동 마을은 담배농사 덕분에 한때 함양군에서 교육 수준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척박한 토지에 논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담배농사도 줄어 들었다. 6.25때는 마을 이장일을 맡으면서 빨치산을 피해 서류보따리를 들고 피해 다녔다. 마천면민들은 지서를 중심으로 면소재지에서 200m 밖으로 3중으로 나무울타리를 쌓아 봉쇄선을 만들고 빨치산과 대항해 마을을 지켰으나 지서와 함양경찰서간 전화를 도청하고 교란시키면서 총알이 떨어진 것을 알고 습격한 빨치산에 의해 많은 면민들이 희생되었다. 그래도 많은 젊은이들이 향토군을 창설하여 면을 지켰다고 옛날을 상기하셨다.

5년 전 마을 앞까지 포장이 되었고 함양 넘어 가는 오도재는 비포장인 채로 차량통행이 어려웠다. 옛날에는 오도재에 당집이 있어 미륵불을 모셔 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치성을 드렸다 한다. 이 마을 뒤쪽으로는 유난히 뾰족한 촉대봉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어 촉동 마을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구양리 마을 뒷산을 속칭 빈대궐터라 부르고 있었다. 김 할아버지 어릴 때는 이곳을 절터들이라 하였고, 3층석탑이 있었으나 논이 만들어지고 석탑은 도굴꾼이 가져가 버렸다. 등구사가 있던 자리로 파악되고 있다. 등구사의 창건년대나 폐찰년대는 알 수 없으나 500여 년 전 탁영 김일손은 그의 지리산 산행기인 속두류록에서 산의 모습이 거북과 같다고 하여 절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며 오래된 문서를 꺼내 보여 주셨다. 한지에 한글과 한자가 병행된 이 글에는 빈대궐의 유래가 적혀 있었다. ‘가락국 수로왕으로부터 구형왕까지 열 왕이 이어오면서 491년에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였음. 전설에 의하면 구형왕(일명 양왕)이 신라에 양국(나라를 건네줌)하였다 하여 후인이 양왕이라 칭함. 신라에는 항복하였으나 불신지의를 품고 지리산 깊은 곳에 은거하매 신라에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왕의 거소에 대궐을 지어 거처케 하였으나 토적의 침범이 심하므로 왕이 부득이 단신으로 산청 왕산을 향하여 도피하던 중 그곳에서 승피하므로 추종자들이 돌을 모아 능을 쌓아 지금까지 전하고 당초 대궐은 빈대궐이라 칭하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농사일에 한창 바쁘신데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많은 면민들이 희생되는 피해를 입었던 6.25사변 때가 가장 고생스러웠다고 말하시는 김 할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다시 밭으로 향하셨다. 98년에는 함양군이 주는 모범가정 상패까지 받으셨다. 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마치고 오도재까지 올라 보았다. 지리산 천왕봉뿐만 아니라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홍수 때마다 피해본 등구 마을

촉동을 내려오다 첫번째 만나는 등구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어귀에 자리잡은 김종연(金鍾演·65) 할아버지댁을 찾았다. 김엽분(57) 할머니와 두 분이 사시며 4남2녀의 자식들중 4남이 바로 옆집에 살고 있다 한다. 김해 김씨인 김 할아버지의 원고향은 이 마을에서 1km 남짓 건너다보이는 조그만 양전 마을이다. 버드나무밭이 많아 양전이란 이름이 붙었고, 400여 년 전 임진왜란을 피해 김 할아버지의 조상 3형제가 충청도 공주에서 피난오시다 한 분은 산내의 백일리에, 한분은 바로 밑 동네인 창원리에 정착하시고, 나머지 한 분이 양전 마을로 들어오셨다.

현재 살고 계시는 등구 마을은 양전 마을보다 100여 년 후인 300년 전에 달성 서씨가 처음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일궜다 한다. 등구재 넘어 전북 사람들은 경상도땅의 등구 마을을 윗등구, 아랫등구라고 불렀다. 이 마을 건너편 논에는 별약소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희한한 약수란 이름의 별약수가 나중에 별약소라 불렸고, 팔도의 나환자들이 몰려와 병을 고쳤으나 마을에 밀어닥친 대홍수 때 없어졌다고도 하고, 누군가 메워버렸다고도 전한다.

김 할아버지는 별약소 자리에 절터가 있어 오래 전 새마을사업을 할 때 논을 파면 거북이 같은 돌이 여러 개 나와 마을 앞에 전시해 놓았으나 누군가 집어가 버렸다 한다. 인근의 창원 마을은 오랜 옛날 곡식을 저장했던 창고가 있었다 하여 창원이라 불렸고, 원정동이란 마을 이름은 원이 지나가다 머물렀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김 할아버지가 국민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았으나 당시 이 마을은 80여 호가 살았고 양전 마을은 30여 호, 창원은 30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일제 때는 마을 대부분의 논이 일본인 소유여서 일본인 논에 소작을 하였다. 식량이 부족하여 배가 고팠던 일제 때는 일본인들이 면소재지까지 강제로 숯을 나르게 하고 아주까리 채취에 가마니 공출은 물론 짚신과 광솔까지 무상으로 공출해 갔다.

장은 오도재를 넘어 함양장으로 나갔는데, 옛날에는 오도재를 오도산이라 불렀다. 여순반란사건이 나기 전 남로당 세력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징을 치고 보도연맹(남로당)에 가입하라고 강권했다. 김 할아버지 선친께서는 동네사람들에게 말세가 왔으니 가입치 말라고 다니시다 반동으로 몰려 재산까지 몰수당하셨다. 이런 선친의 노력으로 6.25가 터지면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반대로 희생될 때 양전 마을 사람들은 해를 입지 않게 되었다.

6.25 때는 앞산에 굴을 파놓고 피신했었으나 15세 때 괴뢰군에게 잡혀가다 도망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해방 전 일본인 소유의 논이 해방되면서 개인소유가 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2천여 평에 대추나무 등을 심고 있으나 신통치 않다고 한다. 정부의 영농후계자금 2천만 원을 받아 축사를 만들고 소를 기르고 있으나, 소값은 내리고 사료와 짚값이 비싸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다.

이 마을은 대부분 논농사를 지으며 살고, 약간의 밭농사를 곁들이고 있다. 60여 년 전인 병자년 대홍수 때는 마을이 폐허가 되었었고,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을축년 대홍수 때 큰물이 또다시 마을을 덮쳤다. 이때 이 마을의 예쁜 처녀가 물을 피해 나무에 올라갔다가 죽었다 하여 주민들이 조그만 비석을 세워 지금까지 위로하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촉동 마을 위의 촉대봉은 가락국 양왕이 피신시 신호를 하는 봉화대로 쓰였던 곳이라고 이야기하셨다. 김 할아버지의 집앞에 자리잡은 커다란 축사에는 송아지가 여러 마리 있었으나 사료를 제대로 먹이지 못해 몹시 말라 있다고 한숨을 쉬신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어요.” 김할아버지와 헤어지면서 들은 얘기였다.

흑돼지 키워 연명하는 창촌·금계

마을 주위의 밭에서는 보리인지 파란 잎이 한껏 올라와 있었다. 등구 마을을 떠나 조금더 아래로 내려오면 올해 폐교된 등구초등학교를 만나고 곧 만나는 삼거리에서 다시 윗쪽으로 오르면 오랜 옛날 창고터라 불렸다는 창촌 마을이 나온다. 산으로 오르는 길이 다한 이 마을은 100여 호의 제법 큰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이 일러준 김영덕(金永德·81) 할아버지댁을 찾았다. 아는 것이 없다고 극구 사양하시는 할아버지와 어렵게 이야기를 나눴다.

김연순(76) 할머니와 22세 때 결혼하여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셨으나 아들 둘은 병으로 먼저 떠나보냈다. 오래 전 조상님이 이곳에 들어오셔셔 정착하였으나 언제인지는 모른다고 하셨다. 일제 때는 현재보다 가구수도 많았으나 전부 못살아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배가 고파 온산을 헤매며 나무뿌리 등을 캐먹었고, 높은 산까지 올라가 화전으로 감자 등을 일궈 놓으면 일본인들이 강제로 걷어가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나락이며, 머루기름, 광솔기름 등을 채취케 했다.

일제 때는 삼나무와 뽕나무를 많이 심어 길쌈을 했고 누에도 키웠다. 길쌈과 함께 한지 생산도 했다. 아직도 이 마을의 한지생산 전통을 이어가는 집이 한 군데 남아 있었다. 김 할아버지는 30대 초반에 일본인 보국대로 끌려나가 함양군 서상에서 기차터널공사에 강제로 동원됐다. “6.25 전후 해서 마을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하며 50년 전의 참상과 함께 일제시대의 고통을 이야기하셨다.

창촌까지 올라오는 도로의 포장은 10년 전에 이뤄졌고 마을 전체가 공동상수도를 사용하고 있다. 김 할아버지의 뜰에는 집공사를 하다 마당에서 캐냈다는 커다란 입석이 천왕봉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언제 눈이 왔었을까? 천왕봉과 제석봉, 중봉 일대가 하얀 눈으로 덮혀 반짝이고 있었다. 30여 년 전 남의 논을 부칠 때가 가장 고생스러웠다고 하시며 이야기를 마치시는 김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앞으로도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고 수심이 가득하셨다.

김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치고 둘러본 창촌 마을에는 빈 집이 많았고 화장실마다 엄청 큰 흑돼지들이 꿀꿀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명한 지리산 흑돼지였다. 이 마을의 20여 명 되던 초등학교학생들은 올해 학교가 폐교되면서 4km 이상 떨어진 마천초등학교로 통학하고 있었다. 창촌 마을은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창촌 마을에서 임천강변의 의탄리로 내려오면 금계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에서 83세의 이희섭(李羲燮) 할아버지를 만났다. 고향이 황해도인 이 할아버지는 50년 전 금계동으로 이주하였다. 올해 폐교된 의탄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셔서 48년간의 교직생활을 의탄초등학교 교장으로 마치셨다.

50년 전에는 대여섯 집이 흩어져 살아 마을 형태를 이루지 못했으나 6.25 때 주변의 금계, 의중, 의평, 추성, 원정 부락 등 5개 마을 주민들이 집단 피난해 의탄초등학교에 머물면서 6.25 후 일부 주민들이 금계에 정착하여 금계동이 생기게 되었다. 6.25 전후 의탄초등학교는 600여 명의 학생과 18명의 교사가 있던 큰 학교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생활이 어려워 초근목피로 연명했고, 학생들은 먹지 못하여 영양부족으로 얼굴이 붓고 대부분 병색이 완연하였다.

이후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점차 초등학생 수도 줄어들어 올해 3월1일부로 폐교하였다. 금계란 마을 이름은 금계 마을 뒷산 이름이 금산이라 하였고, 학교 옆의 지형이 닭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인 것이다. 원래 옛 지명은 노디목(물을 건널 때 밟는 디딤돌)이었다고 하나 오행을 보고선 6.25 후에 금계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이 마을은 40호로서 논밭농사 이외에 나물, 약초 등으로 생활하였으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고, 소 20여두와 지리산 흑돼지를 많이 키운다. 동네 어귀에는 20년 전 석재공장이 생겨 주민들이 부업으로 많이 참가하고 있다. 2남4녀를 두신 이 할아버지도 현재는 장복님(69) 할머니와 두 분만이 살고 계셨다.

지리산이 건너다보이는 금대암

이 할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하며 금계동을 떠나 금대암을 찾아 올랐다. 임천강가 가흥리에 있는 석재공장 옆에 큼직한 돌로 된 안내판이 서있다. 부분적으로 포장된 길을 따라 산을 오른다. 고도를 높여 오를수록 절경이다. 건너편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감탄하며 오르는 산길이 끝난 곳에 금대암이 자리잡고 있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금대암 뜰에 서면 저절로 풍수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금대암은 신라 태종 3년(657년)에 행우조사(行宇祖師)가 창건하였으나 6.25동란 중 소실되었고 1960년 본당을 중건하였다. 마침 절을 찾은 시간에 주지 스님은 출타중이었고 보살 한 분이 기와 불사를 권한다. 해발 847m의 금대산 중턱에 자리잡은 금대암은 울창한 수림에 싸여 있었다.

금대암 뜰에서는 지리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천왕봉 기운이 절에 머무르는 듯한 편안한 곳이었다. 510년 전 김일손은 금대암을 찾았을 때 20여 명의 스님이 범패를 부르며 뜰안을 빠른 동작으로 돌고 있었으며 고승의 주석지팡이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의 금대암은 몇 명의 스님만이 외로이 지키고 있었고, 유난히 붉어 눈길을 끌었다는 모란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금대암을 내려오며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하며 천왕봉의 기를 한껏 느껴 보았다. 이번 일정의 다섯번째 마을인 당흥 부락으로 내려왔다. 이곳 주민들은 면소재지가 있는 당흥 부락을 땅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원래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고 하여 당벌(堂伐)이라고 했는데, 주민들의 억센 발음이 구전되면서 땅벌이 되어 버렸다.

지리산은 신라시대부터 오악의 하나로 선정되어 국태민안을 비는 제사를 지냈는데 특히 이곳 당흥동을 중심으로 귀신을 모시는 사당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한가운데에는 1평도 채 못되는 판자집이 있는데, 이곳이 옛부터 내려오는 당집이라고 하였다. 허름하고 좁은 그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은 대를 이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례를 지내왔다.

당흥 부락 경로회장이신 이동근(李東根·73) 할아버지를 마을회관에서 만났다. 여러분의 할아버지가 대화에 함께 할 수 있었다. 김봉연(65) 할머니와 사이에 6남매를 두셨다. 증조부님이 이 부락에 정착하시게 되면서 이 할아버지는 토박이가 되었다. 일제 때는 80여 호인 마을이 지금은 120여 호로 늘었다. 일제 때는 지금의 마천중학교 자리에서 일본식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징용은 피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 함양장을 다녔으나 가끔 왕복 80리인 벽소령을 넘어 하동장까지 나갔다. 마천의 3대 특산품이었던 감과 옷칠, 한지 등을 내다팔았고, 소금과 건어물 등을 사왔다. 여순반란사건과 6.25 당시에는 마천면민이 많은 희생을 당하면서 용감히 싸웠으나 마천에는 기념물 하나 없이 전적기념관이 뱀사골에 생긴 것은 마천면민으로서는 억울하다고 하셨다. 일제 때 일본인들에게 갖은 수탈을 당하고 배가 고파 소나무밥, 쑥뿌리 등을 먹어 부황이 들곤해서 배가 불룩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당흥 부락도 고령화 되가면서 20~30대는 없고 50대가 젊은 축에 속하며 60세 이상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당흥 부락은 원래 동네 뒷골에 있었으나 터가 세어서 안좋은 장사들이 많이 나온다 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박대통령 당시 새마을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당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섣달 그뭄에서 초하루까지 이틀동안 기도하고 사흘째 되는 날 산제 드리고 내려와 당집에서 당산할머니를 모셨다. 그러나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면서 나랏님 특명이라고 귀신에게 고하고는 당산제를 없앴다. 그러나 당산제를 끝내고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암 종류의 병으로 많이 죽고 마을에 불상사가 많이 나서 지금은 다시 당산제를 지내려 하고 있었다.

이동근 할아버지와 대화를 마치고 당흥 부락을 떠나 귀로에 올랐다. 하얀 눈이 쌓인 천왕봉이 올려다보이는 부락마다 개나리와 진달래, 산수유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지리산에 봄이 와 있었다. 그러나 지리산의 깊은 골은 아직도 겨울의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