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주박에 담기는 샘물이 정갈함은 물론 입술에 닿는 표주박의 감촉이 물맛을 더하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홀로 산을 갈 때는 정상에 오르기보다 샘을 찾아가 한량없이 샘물을 퍼마시고 넘쳐나는 샘물을 바라보다 돌아올 때가 많다. 정상을 오르려고 산에 갔다가 숨어 있는 샘에 발목이 잡혀 샘물만 퍼마시다 돌아온 적이 한두 번 아니다. 이렇게 나는 사실 물 마시기 위해 산을 간다.

‘홀로 산을 찾는 것은 / 가슴에 솟아나는 그리움을 / 샘물로 넘쳐 보내기 위함이다 / 쓸쓸함과 외로움이 무성히 자란 산길에 / 드문드문 바위로 앉은 그대 보고픔 / 그 너머로 적막함과 한가함에 묻혀 사는 샘물 / 한 모금 퍼마셔 보면 / 찰랑찰랑 어깨춤 추고 똘똘똘 노래로 답하는 샘물 / 홀로 산에 가는 것은 한량없이 퍼마신 샘물로 / 깨끗해져 가벼워진 내 영혼을 하늘금 산정에 올려놓기 위함이다.’<졸시 ‘산에 가는 이유’>

물이 없으면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다 알지만 물을 잘 사용하는 방법이나 좋은 물을 구하는 법, 그리고 물맛을 구별하는 방법을 아는 이는 드물다. 물맛을 아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와 삶의 가치는 물론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경험하고 세상을 달관한 나이인 70쯤 되어야 겨우 감지되는 것이 물맛이라 할까? 무덤덤하고 무미건조하여 싱겁기 짝이 없는 것을 맹물맛이라 않던가. 그러나 이 맛 저 맛 다 경험한 사람은 물맛이 최고라 한다. 피로와 권태, 번뇌로 찌든 영혼을 시린 샘물 한 모금이 씻어 준다고까지 여긴다.


산의 특성을 닮는 샘물 맛

맑고, 차고, 가볍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냄새 없고, 탈 없으며, 색깔 없음은 물론 고여 있거나 급히 흐르지 않는 물을 좋은 물이라 했다. 요즈음은 공해로 좋은 물이 사라졌음은 물론 마실만큼 깨끗한 물마저 주위에서 없어졌고, 아예 필요한 물 자체마저 모자라는 심각한 물부족 시대에 접어들었다. 특히 주변에 널려 있던 고맙고 아름답던 샘물은 편리한 수돗물 사용으로 전부 사라져 버렸거나 폐쇄된 상태다. 현대인은 ‘편리함이 최우선’이라는 불치병에도 걸려 엄청난 양의 물을 사용하는 폭력을 휘두르며 모든 물을 맹렬히 오염시키고 있다.

그나마 아직 산에는 샘이 솟아나고 계곡물이 흘러 산을 찾는 사람들의 목을 양껏 적셔 주는데, 고맙기 그지없다. 산을 오르며 땀 흘리고 계곡물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양껏 마시는 물맛이야말로 힘찬 산의 기운을 직접 받는 일이며, 큰 기쁨이다. 산에 올라 샘물 먹는 재미가 산꼭대기 오르는 일보다 못할 리 없다.

길 없는 곳을 무질러가다 바위를 만날 때는 주변에 샘이 있나 유심히 살피고 오른다. 바위틈 사이로 물이 똑똑 떨어지기라도 하면 표주박을 받쳐놓고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린다. 그동안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면 산이 내뿜는 숨소리라 느껴보기도 한다. 또 바위 아래 물기라도 있으면 파서 고이도록 하고 물이 맑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물맛을 보고야 떠날 때가 많다.

아직도 산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샘이 많다. 어쩌면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오묘한 샘도 있을 것이다. 옛날 선조들은 오대산 우통수, 속리산 삼파수, 충주의 달천을 조선의 3대 명수라 했는데, 이보다 훨씬 좋은 샘물이 깊은 산속 어딘가 숨어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계곡의 물은 그 산의 특성을 고스란히 닮는 것 같다. 설악산은 물맛이 너무 강렬해 한두 번이나 소량으로 마시기에는 기막히게 좋지만 오래도록 많이 마시기에는 아무래도 지리산의 은은한 물맛을 당할 수 없을 성싶다.

지리산과 가까운 진주에서 살아 여기 저기 샘물을 마셔 보았는데 그중 좋은 샘 다섯을 말하라면 향적대샘, 촛대봉샘, 중봉샘, 상무주샘, 미륵샘(음양샘)을 들고 싶다. 물론 용암샘, 묘향샘, 제석샘, 치밭목샘, 약수암샘, 박단샘, 미륵정샘, 광덕사샘, 연하천, 뱀사골, 노고단, 장터목, 뱀실, 선비샘, 임걸령샘 등등 무수히 많다. 지리산은 골이 깊고 봉이 높아 솟구치는 샘 역시 아름답고 신비하며 힘차고 멋지다.

신선이 살만큼 경치가 빼어나게 좋은 곳을 동천이라 한다. 화개골짜기를 화개동천이라 하듯이 청암 묵계로 오르는 골짜기는 샘이 많이 솟아 새미동천이라 부른다. 도치만당샘, 은적암샘, 참샘, 시루봉샘, 숨은골, 가능골, 터골샘이 솟아나고, 횡천강의 발원지 외삼신봉(1,288m) 바로 아래에 너무나 신비로운 음양샘인 미륵샘이 두 바위에서 흘러나와 합쳐진다.

20년 전만 해도 평촌리 100여 집이 새미동천을 마시고 샘물가에서 울고 웃고 얘기하고 세상소식을 듣고 살아왔다며 마을 강수석 이장님이 알려준다. 지금은 TV나 PC에서 세상을 알고 희노애락을 느끼고 살아가니 현대는 집집이 PC동천이나 TV동천이라고 할까?

지리산 곳곳에 좋은 샘 숨어 있어

늦더위가 한창인 팔월 중순경, 횡천 삼거리에서 김 화백을 만나 청암면 소재지 평촌리 새미동천으로 갔다. 큰 정자 나무 아래에 대나무 평상이 놓여 있고 그 아래 지붕을 인 새미동천이 있었다. 도로에서 샘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풀이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샘은 30m 관에서 펑펑 쏟아져 나왔는데 수량이 엄청났다. 표주박으로 몇 잔을 연거퍼 마시고 나니 배안이 꿀렁꿀렁 소리가 났다. 정자나무 평상에 누워 한참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옛날 사람들의 문화는 ‘샘물문화’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새미동천을 떠나 외딴집마다 샘이 솟는다는 논골 입구의 은적암샘으로 갔다. 아무도 몰래 숨어있던 은적암도 스님이 바뀐 후 도로를 내버려, 그 좋던 샘이 파괴되어 누런 속살을 드러냈고 물맛도 예전같지 않았다. 논골 마을 위를 20분 걸어 올라 참샘에 닿았다. 깊은 골짜기에 있는 샘물마저 비닐 홈통을 여기저기 설치해 놓았고 샘 주변의 이끼가 옛날의 샘임을 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산속의 샘도 금새 오염되고 소멸할 것 같아 처연한 심사가 되었다.

다시 묵계 삼거리를 지나 고운재에 있는 널뻔지샘(찰랑샘)으로 갔다. 외딴집은 방이 허물어져 있었다. 찰랑샘은 이곳에 수도하는 분들이 마시며 공부에 많은 도움을 얻은 고맙고 신비한 샘이다.

햇빛이 샘 안에 들 때면 주위까지 온통 금빛으로 물들여 밝히는데 그 때면 새들은 물론 나비까지 와 물을 마시곤 간다. 우리도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샘물을 떠 마시곤 바위에 걸터 앉아 전나무에서 우리를 보며 노래하는 새소리를 듣고 칡넝쿨에서 춤추는 나비를 물끄러미 보았다.

고운샘은 널뻔지샘에서 차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다. 원만선사가 거처하는 고운동은 청학동이라 믿을만큼 풍광도 뛰어나지만 좋은 샘이 숨어 있다. 고운샘은 통을 묻고 관을 설치해서 자연미가 훼손되었는데도 물맛은 변치 않았다. 표주박으로 한 잔 쭉 들이키니 더위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상쾌했다. 조금 있으니 뽀그락 뽀그락 샘물 솟는 소리가 났다. 한 달에 두 번만 소리를 낸다는 명화수인데, 땅속에서 힘차게 솟는 샘물이 주위 땅속의 공기를 빼앗아 함께 솟기 때문이라고 원만선사는 들려준다.

다음날 새벽 4시에 원만선사와 함께 삼신봉 아래의 미륵샘을 가기 위해 청암면 학동 마을로 향했다. 삼신봉 가는 등산로를 따라 올랐다. 새벽 안개에 산이 온통 젖어 있었다. 계곡 물소리가 굉장했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 많은 물들이 솟아나 흐르나? 산은 온통 샘물의 천지인가? 삼신봉 오르는 큰 산길에서 미륵샘 오르는 길이 분명치 않고 또 새벽이라 엉뚱한 곳으로 들어서서 길 없는 곳을 한참 헤매며 올랐다.

늦잠 자던 산새도 놀라 달아나고 딱다구리도 딱딱 나무를 두드려 경고를 보낸다. 다래덩굴을 헤치고 이끼 낀 바위를 밟으며 계곡을 무질러 오르니 산죽밭이 무성한 능선에 도착했다. 촘촘한 산죽을 헤쳐 가니 힘이 무척 들었고 이른 아침인데도 땀이 비 오듯 했다.

삼신봉에서 곧장 흘러내린 능선에 도착하니 길이 또렷해 발걸음이 가벼웠다. 5분 가량 오르니 미륵샘인 음양샘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미륵샘 옆에 텐트가 세워져 있기에 두어 번 기침을 하니 스님 한 분이 안에서 나왔다. 샘물 마시려 왔다 하니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음수와 양수 합쳐지는 음양수

도선이 이곳에 와 음양수를 마시며 수도 후 득도했다고 전하며, 근래에는 삼성궁 한풀선사도 이곳에서 수도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소문난 곳이다. 국립공원 안이라 공원측과 수도자 사이에 항상 움막을 부수고 세우는 실랑이가 반복되는 곳이다. 필자의 견해는 이런 곳은 오랜 관습을 인정, 수도자들이 마음 편히 샘물을 마시며 수도할 수 있도록 놓아둠도 좋을성 싶다. 깨달은 사람 하나만 나와도 지리산은 물론 세상 모두를 빛나게 할텐데 왜 그리 악착스러울까?

아무리 마셔도 더 마시고 싶은 미륵샘을 두고 외삼신봉으로 올랐다. 외삼신봉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천왕봉은 아침 안개에 반쯤 가려 있었다. 우리는 능선을 타고 원삼신봉을 거쳐 학동으로 내려섰다. 샘물이 솟아 계곡물로 흐르듯이 물처럼 바람처럼 골짜기 따라 설렁설렁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