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청학동(靑鶴洞)은 존재하는가... 세석 어딘가에 청학동으로 이어진 제3의 문 있으리라


나는 지리산이 다른 산보다 더욱 아름답고 신비한 것은 산이 높고 깊고 넓다는 외형상의 특징 때문이 아니라 세석고원을 비롯해 그 어딘가에 우리의 이상향 청학동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 믿고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꿈꾸어온 이상향은 배고픔, 무서움, 질병, 추위가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신선이 거처하는 장소, 부족함이 없는 신선들의 동네로 가고 싶어 했고, 그들처럼 그곳에서 신선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할 것같은 하늘이나 바다, 지하동굴, 깊은 산이리라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모어의 유토피아,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 제임스 힐튼의 샹그릴라, 도연명의 무릉도원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에서도 제주도의 이어도, 울릉도의 가삼도, 함경도의 오복동, 충청도의 식장산, 삼남지방의 지리산 청학동을 낙원이라 믿어온 것이다.

이중 청학동은 후덕한 산세와 풍부한 산물, 따뜻한 기후, 아름다운 경관 등 구체적인 조건이 묘사돼 오며 강력한 흡인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왔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지리산에 존재하는 청학동을 믿고 살아가거나 찾아다녔고, 심지어 청학동을 다녀왔다는 사람까지도 생겨났다.

필자가 지리산 청학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진주로 옮겨와 덕유산장이란 등산장비점을 연 82년부터다. 버스터미널 앞이라 진주를 기점으로 지리산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장비 때문에 자연스레 산장에 들러서는 산속에서 경험했던 일을 이야기하는 바람에 많이 듣게 되었다. 그중 인상 깊었던 것이 사천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30대 젊은이의 얘기였다.


“청학동을 보고 왔다!”

여름이었는데, 온몸이 흙투성이인 채 장비점에 들어서자마자 숨가쁘게 청학동을 다녀왔노라 자랑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덕평봉에서 능선을 타고 대성골로 내려오다가 길을 잃고 서너 시간을 헤매돌다 지쳐 앉아 있었는데, 바로 앞에 바위굴이 보여 그곳에서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조금 들어가니 동네가 나오고 사람들이 보였다. 배가 고파 한 초옥에 들어섰는데, 노인이 배고픈 자기를 금방 알아보고 소쿠리 가득 찐 감자를 담아와 먹었다고 한다. 그러자 힘이 솟아나 인사하고 길을 따라 나왔는데, 어떻게 굴속을 빠져 나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며 난감해했다.

나는 지도를 꺼내 놓고 시간과 거리, 동네와 사람 모습을 물어보았다. 그때 젊은이는 “초가집과 노인들만 있었으며, 감자가 무척 크고 맛있었다는 기억은 또렷한데 어떻게 굴속이 환하고 또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뒤 나는 72년 진주문화재보호협회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흰옷을 입고 갓 쓴 묵계리 상류의 도인촌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답사해 발간한 <청학동 답사보고서>를 읽게 되었고, 기타 청학동 문헌들을 접하게 되었다.

신라 천년 사직이 기울면서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왜구의 노략질이 점점 심해지자 사람들은 어디 숨어 살기 좋은 곳이 없을까 하고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이 영산 지리산과 그 속의 깊은 골인 하동 화개천이었으리라. 따뜻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산물도 풍부하고 경치도 아름다운 이곳으로 찾아드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마침 도선의 풍수지리설과 청학을 타고 다닌다고 소문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리산 불일폭포에서 사라진 사건 등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청학동이란 이상향이 생겨났다고 추론하기에 이르렀다.

삼신동, 신흥, 의신 등의 이곳 지명이 이런 추론을 뒷받침할뿐더러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청학동 후보지 중 의신, 덕평, 불일폭포, 세석고원 등이 모두 화개골에 있는 것만 봐도 이곳이 청학동의 태동지가 틀림없다고 여겨졌다. 도선비기, 청학동결, 파한집, 겸암일기 등을 비롯해 현재까지 20여 장 넘게 전하는 청학동지도 등을 토대로 청학동의 모양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진주 서쪽 147리로, 지리산 남쪽 기슭 하동 땅이다. 광양 백운산봉이 정면으로, 남해가 맞보이는 곳으로 임좌 방향이며, 전체가 풀밭으로 주위 40리가 평탄한 곳이다. 작답 천여 석에 이르는 곳으로, 천여 호가 지낼 만하다. 중앙이 큰 북, 큰 방과 같은 제비집 형태다. 십리 밖에 내외 석문이 있고 동쪽에 기암, 후룡에는 석각 삼봉이, 백호 방향에 인암이 있으며, 좌우에 해바위와 달바위가 있다. 돌우물이 있고 바위 벽에는 ‘이청년(李靑年)’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으며 큰 연못인 용지가 있다. 물은 서쪽에서 솟아 동쪽으로 흐른다.

위와 같이 상세히 표현해 놓았다. 그러나 이런 청학동 지형 설명은 시대를 거치면서 풍수지리쪽으로 덧붙인 흔적이 보인다.

청학동을 찾아나선 첫 기록으로 알려진 것은 고려 때 학자 이인로의 일화다. 조선조 중엽 이규경은 이인로와 마찬가지로 청학동에서 살 목적으로 찾아갔으나 실패하고 돌아온 과정을 세세히 적어놓았다. 한편 김종직은 피아골, 조식은 불일폭포를, 겸암 유운룡은 세석을, 그리고 김일손은 사실이 아닌 전설로 청학동을 단정지었다. 특히 겸암은 등촌에서 시작해 사흘 노숙하며 청학동을 올랐는데, 석문이 나오고 둘레 40리의 토지가 있고 돌샘과 ‘이청년’ 각자가 바위에 새겨진것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이는 지금 남부능선으로 하여 세석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모습과 같다.

  글보다는 훨씬 사실적인 것이 청학동도라는 지도들이다. 난을 피해 지리산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그렸거나 원래 살았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청학동 그림이 은밀히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또 필요에 의해 그려지며 점차 많아졌을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제일 오래 되었다고 여겨지는 청학동도는 1700년대에 그려졌다고 하는, 박종한씨(전 진주 대아고교 교장) 소장본이다. 진주의 향토사학자 오림 김상조씨와 하동 학동의 김삼주씨(청학동 연구가)가 20여 장의 필사본과 복사본을 가지고 있으며 지리산 삼성궁의 한풀선사는 초옥에 청학동도를 20여 장 전시해 놓았다.

한풀선사의 말에 의하면 그간 전해온 청학동도는 100장으로, 요 근래에도 한두 장
청학동圖
  더 발견되었다고 했다. 한편, 세석으로 가는 석문에서 만났던 청학동을 믿는 노인

은 “현재 세상에 나도는 청학동도는 40장이 안되며, 나머지 60여 장이 세상에 나와 100을 채울 때 그때 낙원이 된다”고 했다. 그는 존함을 묻기도 전에 능선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청학동은 과연 얼마나 좋은 곳일까. 신선이 청학을 타고 노니는 곳으로 중국의 기산, 곡부와 함께 천하 3대 명지라 했다. 옥룡자 도선은 ‘세상을 기다리는 보배며 동방의 으뜸’이라 했다. 도인이 나와 경영하는 길지, 미륵이 출현해 사람들이 신선과 성현이 되는 장소, 천황이 태어나는 자궁터 등등으로 전한다.


그렇다면 이런 청학동은 과연 있는가? 있다면 지리산 어디인가? 많은 이들이 8청학이니 12청학이니 하는데 전해오는 청학동 후보지로는 세석고원, 덕평고원, 의신, 불일폭포, 악양, 피아골, 고운동, 학동을 말한다. 근래에는 쇠밭고원, 논골, 절골, 동점을 거론하기도 한다.

필자는 지난해 진주 MBC ‘청학동을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두 달동안 지리산 곳곳을 누비며 청학동을 찾아 헤매 돌았고, 청학동 추정지에 살며 청학동을 믿는 사람들, 또 청학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청학동은 어떤 곳이고 어디인가” 하는 물음에 그들은 각각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기록대로라면 현재의 지리산에는 없다고 보인다. 앞으로 우리가 힘을 모아 지리산에 청학동을 새롭게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 청학동은 의식과 영혼이 성숙되고 고양되는 성스런 장소가 될 것이다.”(한풀선사)

“악양이다. 전해오는 청학동의 지형 설명과 이곳이 꼭 맞아 떨어진다. 앞으로 청학동은 인격 양성지지로 변화, 계승되어야 한다.”(<지리산 도인을 찾아서>의 저자인 악양의 일하스님)

“인간이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도래한다고 본다. 전해오는 이야기를 믿는다면 고운동 역시 청학동과 부합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고운동의 원만선사)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모든 자료와 추측까지 더한다면 현재 청암면 학동의 뒷산 어디쯤일 것이다.”(학동의 청학동 연구가 김삼주씨)

불일폭포 불일휴게소 변규화씨는 “자기가 사는 곳이 청학동이제” 했고, 원대성 초막에 사는 정 처사는 “심청학이지요. 지리산에 살아보고 그곳이 몸과 마음에 꼭 맞는다면 청학동이지요”했다. 악양 청학이골의 청학동연구가 이형석씨는 “모두 자기가 사는 곳이 청학동이라 하는데, 엄연히 지명상 청학이골인 여기가 청학동 아닌감?” 하며 웃었다.


세석에 30여 가구 살았던 흔적

악양 형제봉 아래의 청학사 주지 현법 스님은 “도대체 무슨 소리들인가? 청학동은 굴 속에 있는데” 하며 당장 안내할 것이니 따라오라고 했다. 그는 앞장서 형제봉으로 올라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굴로 들어갔다. 굴은 예부터 기도처로 사용해왔는지 촛불을 켠 흔적이 광장 곳곳에 있었다. 200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광장에서 굴은 좌우 두 갈래로 갈라지고, 굴을 따라 20m 들어가니 갈라졌던 두 굴이 다시 만났다.

그외 무수한 가지굴이 있는데,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제일 큰 곳을 택해 10m쯤 들어가니 천장이 낮아지고 좁아져 누워서 10m 더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굴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려, 더는 갈 수가 없었다. 돌을 주워 떨어뜨려 보니 통통, 하며 바위에 부딪치며 내려가는 소리가 한참 계속되며 점점 사그라들면서 없어졌다. 이로 보아 무척 굴이 긴 것같았다.

스님은 “이 굴속에 청학동이 있는데, 여름 겨울 한 번씩 지하 청학동이 숨을 쉴 때 내뿜는 입김이 굉장하다. 지금은 굴이 무너져 막혔지만 훗날 굴이 열리면 청학동에 갈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세석의 촛대봉 아래 선모초란 약초를 캐러왔던 73세의 손병구 노인은 “나이는 묻지 마. 갑자생이여. 우리만큼 고생스런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구먼. 징용 피해 아홉 식구가 이곳에 살러 왔었어. 해방 전까지 3년간 감자만 심어 먹고 도토리 주워 먹으며 살았제. 그때가 일생중 가장 좋은 시절이었어. 바로 청학동에 살았는기라. 노모 때문에 산을 내려가 지금 담양에 살고 있지만, 해마다 이곳을 못 잊어 올라와 일주일 살다 가제. 그때마다 선경이여, 선경. 누가 뭐래도 이곳 세석이 청학동이여” 하며 감탄, 감탄이다.

그 분의 말을 듣고 세석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30여 가구가 살았던 집터와 돌담, 돌우물, 돌확, 다섯 군데의 돌탑과 제단, 네 개의 무덤, 지름이 20m이고 깊이는 두 자인 타원형의 청학연못, 그 주변 바위에 새긴, 파자(破子)로 된 글씨, 많은 샘과 토굴터를 확인했다.

세석고원은 물이 풍부해 습지가 많고 어디든지 한 자가 넘는 부식토층이라 곡식이 잘 되는 옥토로서 사람이 살아가기에 최고의 조건을 갖춘 곳으로 보였다. 여기저기 있었던 밭은 모두 산죽밭으로 변해버려 처연한 감정이 솟아났다가 곧이어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었다면 세석 이외에는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고, 나는 흥분에 싸여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남향이고 백운산봉과 남해가 보이고 약샘이 여기저기 솟아나는 세석은 하늘 아래 제일 높고 넓은 지리산 고원이며 선경지다. 더구나 여감자, 정걸방이 이곳에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졌고, 허우천 역시 세석고원으로 사라졌다. 물론 난 고운 최치원도 이곳에서 사라졌다고 확신한다. 세석 어딘가에 시공간의 겹친 틈새, 달리 표현한다면 청학동으로 통하는 문이 있으며, 세석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 문으로 들어가버리며 사라졌다고들 법석을 떨었던 것은 아닐까?


기인 허우천도 청학동으로?

지난해 유월 필자는 지리산 대성골의 상단부이자 세석고원 바로 아래인 영신대에 갔다. 장군봉 아래의 제단에 1인용 텐트를 치고 주변을 탐사하며 열흘을 보냈다. 23년 전(76년) 자신의 환갑날에 지리산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허우천님을 그리며 행여 선생님의 시신이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지리산에서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제일 험한 곳이며 산의 정기가 제일 많이 어려 있어 이곳에서 공부하면 누구나 영험을 얻는 신비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 영신대다. 곳곳에 수도처가 널려 있고 샘과 굴, 그리고 절터와 뜰이 있어, 구도에 뜻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탐을 내고도 남을 곳이다.

나는 아보세트 고도계를 가지고 첫날은 1,400m 고도를 유지하며 영신대 아래쪽 골짜기를 가로로 누볐다. 절벽과 봉우리가 연이어지고 동굴도 있었다. 도상 거리 2km 정도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데 꼬박 하루인 8시간이 소요되었다.

이튿날은 1,450m고도를 5시간, 다음날은 1,500m 고도를 3시간, 1,550m대의 고도에서 1시간, 그리고 1,600m대 고도를 30분쯤 뒤졌다. 당시 바위굴을 12개 발견했으며 그중 5곳은 사람이 생활한 흔적을 보았다. 5곳 중 2곳은 짐승 털가죽 깔개, 용기 약탕기, 낫, 가죽 신발이 있었다. 혹시 우천 선생님이 생활한 곳이 아닐까 하고 가슴 두근거리며 세세히 살펴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곳은 좁은 굴로서 탐색이 불가능해 굴안으로 돌을 던지니 굴러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들려왔다. 또한 혼자서 오를 수 없는 바위벽과 봉우리가 두 곳 있었다. 열흘간 쌀 한 되로 지탱하며 골짜기와 바위벽을 누볐는데, 별로 힘든 줄을 몰랐고 탐사 내내 이상한 기운에 휩싸여 몸이 가볍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허우천님의 시신과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몇 가지 재미난 추론을 해볼 수 있었다. 하나는 해발 1,600m의 지리산 높은 곳에 세석고원이 존재하게 된 것은 영신대 주변의 땅이 밀어올려져서 이루어진 것이기 쉽다는 점이었다. 영신대 주변이 온통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졌고 바위굴이 많은 것은 형성과정이 그러했기 때문이 아닐까. 바위벽과 봉이 세석고원을 하늘 높이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고, 그 사이에 중력의 공백상태가 된 어떤 공간이 생겨나 영신대와 세석고원 주변에 떠도는 것은 아닐까.

우연, 혹은 필연으로 그런 공간에 들어서면 우리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세석을 사랑하며 세석에서 살다 세석에서 사라진 우천 선생님도 그런 시공간의 틈새를 보고 걸어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찾는 청학동은 아닌지 하며 오만 가지 상상을 펼쳐본 것이다.

세석에서 몇 년씩 공부한 진법달님, 대익도사, 홍 보살, 김 처사, 정 선생은 물론 엿장수 이씨까지도 세석에서는 구름의 변화하는 모양만 바라보고도 한 10년을 족히 살 수 있다고들 말했다. 천지가 구름에 잠긴 날, 천둥번개가 치는 날, 꽃 피고 새 우는 날, 가랑비에 꽃잎이 젖어 떨어져 풀 위를 덮는 날, 그런 날 우연히 마음을 텅 비우고 자연과 자신이 하나 되는 그런 순간에 하늘은 시공간의 틈새를 슬쩍 보여주는데, 그때 자기도 모르게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보면 이 세상 아닌 세계, 즉 청학동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사실 꽃 피고 잎 돋는 초여름, 세석에 한 번 가 보면 그 자체가 선경이고 청학동이라 할 만한 곳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청학동을 찾아서’의 제작팀은 헬리콥터를 전세내어 지리산 상공을 두 시간 동안 돌았는데, 그때 본 세석은 정말 신비했다. 하늘에 떠받쳐 놓은 고원으로 신선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이 살고픈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악양을 본 김석창PD는 청학동이 존재한다면 악양일 수밖에 없다고 못을 박을 정도 공중에서 본 악양 또한 대단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청학동의 존재는 서구적이거나 과학적인 논리로 증명할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종교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청학동의 존재도 마찬가지로 논리를 넘어선 자리에 있다. 20세기 초에 발견된 별의 개수나 곤충, 식물의 개체 수가 100년간 수백 배에서 수백만 배로 늘어난 것은 없었던 것이 생겨서가 아니라 못 보았던 것을 볼 수 있는 눈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믿는다. 청학동은 지리산중에, 시간과 공간이 찌그러진 틈 사이의 세계이며, 자연의 일시적인 현상에 의해 변하거나 이동하는 공간임을-. 또한 지리산을 사랑한 사람들의 염원이 뭉쳐 있어 아주 특별한 사람만이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어온 이상향 청학동을 서로의 가슴에 새롭게 복원시켜 이 세상을 아름다운 이상향으로 가꾸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이라는 데는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글/성락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