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갠 언덕 위 풀빛 푸른데 (雨歇長堤草色多)
남포로 님 보내는 구슬픈 노래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大洞江水何時盡)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別淚年年添作波)

정지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님을 떠나보내며 흘리는 눈물 때문에' 대동강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고 노래하였다. 말없이 흐르는 대동강을 보면서 애별리고(愛別離苦)의 사랑과 눈물을 떠올린 그는 분명 천재임에 틀림없다.

대동강 만큼이나 시인들의 대접을 많이 받은 강으로서 또한 섬진강을 들 수 있다. 섬진강은 전북 진안의 옹달샘에서 비롯하여 지리산을 끼고 돌면서 구례에서 하동까지 80리길을 흘러 마침내 광양만으로 빠져 나가는 200여 Km의 장강이다. 이제 그 물길을 따라 강을 노래하고 싶은 시인들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섬진강에로의 조용한 기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이중환(李重煥)이 섬진강 유역을 돌아보고 나서 {擇里志(택리지)}에,

두 도 사이에 끼어서 물자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어, 넓은 들이 모두 비옥하다. 별이 드물고 달 밝은 밤이면 강 위의 작은 배가 홀로 양쪽 기슭을 오간다. 세상이 전하는 말로는, "오봉산에 있는 선인이 지리산을 왕래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중략) 이곳은 동쪽에 지리산이 자리잡고 있어, 평시나 난세나 언제라도 살 만한 곳이다.

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섬진강변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히었나 보다.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의 작가 곽재구는, 대학 시절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도보 여행을 하였는데,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이불자락인 섬진강의 모래를 등에 지고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은 그대로 램프의 꽃밭이었다. (중략) 램프의 도움 없이 책을 읽고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섬진강변에서 꼬박 하룻밤을 눈뜨고 새운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자연의 특급비밀이다.

이라며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찬미하였다. 요즈음 젊은이들 중에는, "콘도에서 편하게 자면 될 것이지, 모기 물려 가면서 웬 청승이냐"고 웃어넘길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곽재구 시인이 대학을 다녔던 70년대 중반에는 그것이 낭만이고 아름다움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곽시인이 머물렀던 압록에는 예로부터 여름철에도 모기가 살지 않는다고 한다.

섬진강을 노래한 시나 수필은 아주 많은 편인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한결같이 '저문 강'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의 <저문 섬진강에 부치는 노래>라는 글에서,

섬진강은 특히나 해질녘 노을 물들 때가 정말 아름답다. 한낮의 섬진강은 진초록 쑥빛을 띠지만 석양을 받아 반사하는 저물녘의 섬진강은 보랏빛으로 변한다. 그 풍광의 경이로움을 보통내기들은 절대로 묘사해내질 못한다. 그래서인지 섬진강을 읊은 시인들은 한결같이 저문 섬진강을 노래했다.

라면서, 시인들이 한결같이 '저문 섬진강'을 노래한 까닭을 '아름다운 보랏빛'을 들어 나름대로 설명하였다. 그래서인지 고은 시인도 <蟾津江>이라는 시에서, "뼈저리거든 뼈저리게 서럽거든, 섬진강을 저문 섬진강을, 아주 오랫동안 보라"하였고, 이시영 시인도 <형님네 부부의 肖像>에서 '보랏빛 물결의 저녁 섬진강'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섬진강변에서 태어나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저문 섬진강에 대한 애정은 특별하기 그지없다.

이처럼 많은 시인들의 사랑을 받은 섬진강은 원래 사수강·사천·두치강 등으로 불렸는데, 고려 우왕 11년(1385)에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이 있어, 이때부터 강 이름에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이 되었다고 한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섬진강변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으로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임진왜란 중에는 전라도 지역의 최초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19세기 후반에는 가렴주구의 탐학한 수령에 대항한 농민의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나라를 빼앗긴 이후에는 항일의병 투쟁도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해방과 분단의 과정에서는 빨치산 투쟁의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힘들고 애환어린 역사를 간직한 섬진강이기에, 시인들에게는 오로지 '저문 섬진강'으로 노래되었지 않나 싶다.

섬진강변의 영욕의 역사는 지금 아련하게 사라져 버리고 쑥빛 강물만 유유히 흐르고 있지만, 그 유구한 시간의 흔적은 도처에 남겨져 있다. 아름다운 부도(浮屠)로 유명한 연곡사, 단풍과 계단식 논의 상징 피아골 계곡, 문화유산의 보고 화엄사, 감로수의 천은사와 십리 벚꽃길의 쌍계사, 동서화합의 상징 화개장터,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을 이룬 평사리,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섬진강변 수천년 역사의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올 여름에는 가족과 함께 연인과 더불어 섬진강변을 찾아보라. 섬진강의 맑은 물은 돌멩이를 던지면 쨍그랑 깨질 것 같은 푸르고 공활한 가을 하늘에 충분히 비견될만 하여, 가히 감동적이다.

섬진강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산물은 참게와 은어요리인데, 참게에 비벼먹는 밥맛과 수박향 나는 은어 맛은 별미라고 한다. 꼭 섬진강변을 따라 은어의 우아한 자태를 감상하지 못하더라도, 도심에서 시 한편을 읊조리며 수박을 먹으면서 '은어 향'을 느껴보는 것도 현대인의 또다른 풍류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세상
우리 사는 일이
저물 일 하나 없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변으로 가
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팍팍한 마음 한끝을
저무는 강물에 적셔
풀어 보낼 일이다.

- 김용택의 <섬진강 5>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