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부터 바짝 따라붙은 전라선 철길과 함께 섬진강을 나란히 달릴 때면 강 건너 산자락에 편안히 자리잡은 강변마을들이 더없이 정겹게 다가온다.
그러나 구례 입구에서 전라선을 순천 쪽으로 내려보내고 지리산 밑으로 사뭇 섬진강 을 따라가노라면 철 따라 강가에서 은어를 잡고 재첩을 줍는 풍광이 산수화 속의 한가한 점경인물(點景人物)로 다가온다. 그리고 화개장터 강나루에는 건너갈 사람을 기다리는 나룻배가 거기를 지키고 있고, 악양 평사리께를 지나자면 은모래 백사장의 포플러가 항시 강바람에 휩쓸리곤 한다.

본래 이 길은 무리지어 피어나는 꽃길로도 이름높다. 진달래, 개나리 피는 계절 아름답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리요마는 그보다 약간 앞서 피는 구례 산동면 상위마을의 산수유꽃과 그보다 약간 뒤에 피어마는 쌍계사 계곡 10리 길 벚꽃은 이곳의 본디 큰 자랑이다. 게다가 연전에는 강 건너 광양 쪽으로도 백운산 자락을 타고 섬진강에 바짝 붙여 새 길을 내었는데 다압면 섬진마을에서는 청매실농원에서 재배하는 매화밭이 하도 엄청스러워 매화꽃 향기가 지나는 차창에까지 파고든다.

그리하여 해마다 삼월 하순에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부터 매화와 벚꽃까지 모두를 즐길 수 있는 날이 며칠은 있게끔 되어 있다. 그때가 섬진강 답사의 황금기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번 답사 때는 그런 좋은 꽃철을 다 놓치고 5월의 섬진강변을 달리면서 신록이 아름답다고 스스로 위로해보는데 구례토지면 오미리,운조루(雲鳥樓)가 있는 묵은 동네 뒷산 솔밭으로는 가볍게 지나가는 봄바람에도 노오란 송홧가루가 황사를 일으키듯 회오리를 치며 멀리 날리고 있었다.


저문 섬진강에 부치는 노래

섬진강은 특히나 해질녘 노을 물들 때가 정말 아름답다. 한낮의 섬진강은 진초록 쑥빛을 띠지만 석양을 받아 반사하는 저물녘의 섬진강은 보랏빛으로 변한다. 그 풍광의 경이로움을 보통내기들은 절대로 묘사해내질 못한다.
그래서인지 섬진강을 읊은 시인들은 한결같이 저문 섬진강을 노래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의 [섬진강1] 끝구절은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고 했는데 고은 선생의 [섬진강에서]는 첫구절이 "저문 강물을 보라. 저문 강물을 보라."로 시작한다.

그런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섬진강의 시인은 이시영이다. 구례에서 태어나 구례 중학교를 나온 그의 섬진강 노래에는 고향의 따스함과 그리움이 짙게 서려 있어 차창 밖으로 노을을 비껴보면서 사치스런 낭만이나 화려한 애수를 늘어놓는 우리들의 서정과는 다르다. 그의 시 중에서 [형님네 부부의 초상]({바람 속으로},창작과 비평사1986)은 잔잔한 감동이 가슴까지 저미는 명시다.


 
  고향은 형님의 늙은 얼굴
  혹은 노동으로 단련된 형수의 단단한 어깨
  이마가 서리처럼 하얀 지리산이 나를 낳았고
  허리 푸른 섬진강이 나를 키웠다
  낮이면 나를 낳은 왕시루봉 골짜기에 올라 솔나무를 하고
  저녁이면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먼 곳을 그리워했지

   (...)
  고향은 형님이 늙은 얼굴
  혹은 노동으로 단련된 형수의 너른 어깨
  우리가 떠난 들을 그들이 일구고
  모두가 떠난 땅에서 그들은 시작한다
  아침노을의 이마에서 빛나던 지리산이
  저녁 섬진강의 보랏빛 물결에
  잠시 그 고단한 허리를 담글 때까지
 

 
글/유홍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