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지리산기행  ㅣ 잊어버린 길을 따라 잃어버린 마음 찾아
 
 
 
  선인들의 지리산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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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以下, 선인들의 기행문에서 발췌한 한 글입니다.


' ... 덕봉사의 중 해공이 와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한백원이 따라 나섰다. 드디어 엄천을 지나서 화암에서 쉬는데 중 법종이 뒤따라 왔다. 그에게 길을 물으니, 자못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역시 길을 안내하도록 하였다.

지장사에 도착했다. 길이 가닥이 났으므로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 골짜기와 숲이 맑고 깊숙하여 벌써 아름다운 경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마장쯤 가니 환희대 라는 바위가 있었다. 태허와 백원이 그 마루턱에 올랐다. 그 아래는 천길이나 되는데 금대암, 홍연암, 백련암 등 여러 절이 굽어 보였다.

먼저 선열암을 찾았다. 암자는 가파른 절벽 아래에 지었다. 그 아래로 맑은 샘 두 개가 있었다. 담장 밖에는 바위 홈으로 물이 흐르는데, 물방울이 오목하게 파인 납작한 바위 위로 떨어져 괴어 있었다. 마치 깨끗한 못과 같았다. 그 틈에는 몇 마디쯤 되는 적양과 용수초가 듬성듬성 나 있었다. 곁에는 돌계단이 나 있고 등넝쿨 한 가닥이 나무에 매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붙잡고 묘정암과 지장암에 오르내렸다.
법종이 "한 비구승이 참선하면서 우란분을 만든 뒤 구름처럼 노닐다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였다. 지금은 돌 위에 오이와 무가 심어져 있고 두어 되의 곡식을 찧을 만한 조그마한 절구통이 놓여 있을 뿐이다.

다시 신열암을 찾았다. 중이 없는 빈 암자였다. 이 역시 치솟은 벼랑을 등지고 있었다. 동북쪽에는 독녀암이라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높이가 천여 자나 되고 다섯 가닥으로 갈라져 있었다. 옛날 어떤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다 돌을 포개어 집을 만들고 혼자 살면서 도를 닦은 뒤 공중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때문에 그런 바위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법종이 한 말이다.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있었고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었다. 그곳에 올라 가려면 사다리를 놓고 잣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돌고 돌아야 하는데, 등과 배가 모두 벗겨진 뒤에야 꼭대기에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목숨을 내건 자가 아니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따라온 아전 옥곤이와 용산이는 벌써 올라가서 발을 구르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지방(산청)을 오가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았을 때, 여러 산봉우리와 함께 하늘을 받치고 있는 듯이 솟아 있었다. 지금 이곳에 와서 보니 몸이 오싹하고 황홀하여 내가 이 세상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조금 서쪽으로 돌아 고열암에 이르렀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그 서쪽에는 의논대가 있었다. 극기 일행은 뒤에 쳐졌다. 그래서 나 혼자 지팡이를 짚고 삼반석에 오르니 발 아래에 향로봉과 미타봉이 내려다 보였다.법공의 말에 의하면, 절벽 아래에 석굴이 있다고 한다. 옛날 이 석굴에는 노숙과 우타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해탈한 세 승려와 함께 이 돌에 앉아 불교의 진리를 논하다가 문득 도를 깨쳤다고 한다. 그래서 의논대라는 바위 이름이 붙은 것이다.

조금 뒤에 중 하납이 와서 합장하며 "듣자니 원님이 구경왔다는데 어디 있는가" 하였다. 법공은 그 중에게 눈짓을 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이를 눈치 챈 하납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나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여 위로하였다. "불을 쬐고자 하는 자는 부엌을 다투고, 쉬고자 하는 자는 자리를 다투는 법일세. 이제 그대가 한 늙은이를 만났으니 누가 원님인 줄을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법공 등이 모두 웃었다.

오늘은 첫날이라 시험삼아 거의 20리 길을 걸었다. 몹시 피곤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가 한밤중에 잠을 깼다. 밖을 내다보니, 달빛이 여러 봉우리를 삼켰다 뱉었다 하고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

새벽에는 더욱 음침하였다. 중이 말했다.
"제가 이 산에서 오래 살면서 구름의 형상으로 점을 쳐보곤 하였는데,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소리에 모두들 기뻐하였다.우리 일행은 짐꾼을 갈라서 돌려보낸 뒤, 절에서 나와 즉시 떠났다. 푸른 등넝쿨과 깊은 대숲 속에는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시냇길에 넘어져 있어 다리가 되기도 하였다. 쓰러진 나무 중에는 절반이나 썩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지가 땅을 막고 있어 말을 탄 것 같았다. 머리를 숙이고 그 아래로 나와 한 고개를 넘었다. 법공이 이르기를 "여기는 앞으로 넘어야 할 아홉 고개 중에서 첫번째 고개입니다" 하였다.
계속 걸어서 서너 고개를 넘으니 한 골짜기가 보였다. 골짜기 주위는 넓고 깊숙하며 수목이 햇빛을 가리고 다래덩굴이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시냇물이 돌에 부딪쳐 구비치는 소리도 들렸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진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 길을 걸으면 의탄촌에 이른다.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한 뒤 서속, 기장, 삼, 콩 등을 심고 살면 저 무릉도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볼거나" 하고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서 산능선을 따라 걸었다. 지나가는 구름이 나직이 삿갓을 스쳐가고 풀과 나무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진주 땅인데, 안개가 자욱하여 멀리 바라볼 수 없었다.

이윽고 판자로 지은 청이당에 도착하였다. 네 사람이 각각 당 앞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여기서부터 영랑점까지는 길이 극히 위험하였다. 이곳이 바로 <봉선의기>에서 "뒷사람은 앞 사람의 발 밑만 보이고 앞 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보인다"고 한 곳이다. 나무 뿌리를 휘어잡고서야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정오가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점에 올랐다. 함양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고 험준하였는데, 여기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이 올려다보였다.
이곳을 영랑점이라 부르는 것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영랑이 삼천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산수를 유람하다가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옆에는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는 소년대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혹시 그 소년은 영랑의 문도가 아니었을까. 나는 바위 귀퉁이를 감싸 안고 그 밑을 내려다보니 꼭 떨어질 것만 같았다. 따라온 사람에게 그 곁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하였다.

때마침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해가 아래로 비쳤다. 그러자 산의 동쪽과 서쪽의 광활한 계곡이 산뜻하게 바라다보였다. 계곡에는 잡목은 없고 모두 삼나무, 회나무, 소나무뿐이었다. 그 중 삼분의 일은 말라 죽어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고 간간이 단풍이 들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산능선에 있는 것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가 모두 왼편으로 쓰러져 있고 앙상한 가지는 굽어진 채 머리칼처럼 나부꼈다. ...'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1492年) 발췌
[지리산에 가련다] - 김양식/한울/1998

   



 
   
   
 
 
   
 
도움될 서적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최석기외 옮김/돌베개/2000
  [지리산에 가련다]  김양식/한울/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