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천은사 실상사 연곡사 영원사 쌍계사 칠불사 법계사 벽송사 내원사 대원사 문수사
 
   
   

 

 화엄사

 

 


 
[창 건]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華嚴宗)을 선양하였던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화엄사의 창건 및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1936년에 찬술된 ≪대화엄사사적 大華嚴寺事蹟≫ 등의 모든 사적기들은 544년(진흥왕 5) 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구례속지 求禮續誌≫에는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주석하게 하였다고 부연하고 있다. 화엄사의 중건에 대해서도, 신라 선덕왕 때에 자장(慈藏)이 증축하고, 문무왕 때에 의상(義湘)이 장륙전(丈六殿)을 건립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에 속하였던 화엄사를 자장이 중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 797년(원성왕 13)에 번역된 정원본사십화엄(貞元本四十華嚴)이 의상에 의하여 석각(石刻)되어 장륙전의 사방 벽에 장식될 수 없다고 하는 점, 그리고 양식으로 보아 현존 화엄사의 석조물이 모두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고 하는 점 등에 의하여,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의문은 1979년에 신라 경덕왕대의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이 발견됨으로써 완전히 풀렸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여 연기는 황룡사(皇龍寺)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13) 8월부터 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던 실존인물임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창건 연대가 신라 진흥왕 때가 아닌 경덕왕 때이고, 아울러 자장 및 의상의 중수 또한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중 수]
그 뒤 이 절은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하여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광종 때에 홍경선사(洪慶禪師)가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문종이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이를 저장하기 위한 2채의 큰 창고를 일주문 밖에 짓기도 하였다. 또한, 인종은 정인왕사(定仁王師)로 하여금 이 절을 중수하게 하고 1172년(명종 2) 도선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충숙왕 때에는 조형왕사(祖衡王師)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화엄사는 1424년(세종 6)에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었지만,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석경(石經)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에 각성(覺性)은 1630년(인조 8)에 중건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약간의 건물을 이룩하였고, 1649년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승격되었다.

1702년(숙종 28)에는 각성의 뜻을 이어받은 성능(性能)이 장륙전을 중건하였는데, 숙종은 이를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賜額)하고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격을 높였다.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1757년(영조 33) 대웅전을 중수했고 1769년 각황전을 중수했다. 1798년(정조 22)과 1827년(순조 27)에 각각 적조당과 보제루를 중수했다. 1977년 각황전 해체보수를 완료했으며, 1984년부터 만월당·일주문을 세웠다. 1989년 원융료·청풍당을 짓고, 연기암을 복원했다.

[주요고승]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던 이 절에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창사의 이념인 화엄사상의 구현이 이루어져 왔다. 창건주인 연기조사를 비롯하여 정행(正行)·낭원(朗圓)·현준(賢俊)·결언(決言)·관혜(觀惠) 등의 화엄학승(華嚴學僧)들이 머물렀다. 특히 신라 말 화엄학이 남북악(南北岳)으로 나누어져 대립할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福田)이었던 관혜가, 고려 왕건(王建)의 복전이었던 해인사의 희랑(希朗)과 대립된 학파(學派)를 형성함으로써 이 절이 중요시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의천(義天)이 이 절에 들러 연기조사의 영정(影幀)에 예하고 그를 찬탄하는 시를 남겼으며, 의천의 문도인 정인왕사는 이곳에서 도량을 베풀었다.

조선 시대에도 이곳에서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다. 특히, 선수(善修)가 ≪화엄경≫을 강의하여 그 종풍(宗風)을 크게 드날린 뒤 각성·처능(處能)·수초(守初)·명안(明眼)·새봉(璽峰)·조관(璽冠)·윤장(玧藏) 등이 그 뒤를 이어 화엄사상을 펼쳤다. 이들 외에도 해안(海眼)이나 임진왜란 당시 주지로 절을 수호한 설홍(雪泓)·윤눌(潤訥)을 위시한 많은 고승들이 이 절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였고, 근세에는 대강사 진진응(陳震應)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당우와 문화재]
화엄사의 현존 건물은 각성이 중건한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金剛力士) 및 문수(文殊)·보현(普賢)의 동자상(童子像)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제3문인 천왕문(天王門)이 있는데,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 사천왕상(木刻四天王像)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普濟樓)가 종루(鐘樓)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있다. 동서 쌍탑(雙塔)의 정면에는 대웅전, 그 서쪽에는 각황전이 있으며, 이 밖에도 영산전(靈山殿)·나한전(羅漢殿)·원통전(圓通殿)·명부전(冥府殿)과 노전(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 및 요사(寮舍)인 원융료(元戎寮)·청풍당(淸風堂)·만월전(滿月殿) 등이 있다.

이 중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에 조성된 삼신(三身)의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후불탱화(後佛幀畵)가 있다. 또한,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수법이 뛰어나다.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제루(普濟樓)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는 각황전 앞 석등(石燈)과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노주(露柱)·동서오층석탑(東西五層石塔)·석경 등의 중요한 유물이 전해 오고 있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의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높이 6.36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은 8각의 하대석(下臺石)이 병(甁) 모양의 간석(竿石)을 받치고 있고,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각황전 서남쪽의 높은 대상(臺上)에는 3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 탑을 받이고 서 있는 승상(僧像)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꿇어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사사자석탑은 창건주 연기의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효대(孝臺)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통전 앞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방형(方形)의 석단(石壇)을 받치고 있는데, 이를 흔히 원통전전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300호)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앞의 계단 아래에는 양식을 달리하는 동서 양탑이 있다. 보물 제132호인 동탑(東塔)은 보물 제133호인 서탑(西塔)에 비하여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고, 단층기단(單層基壇)으로 되어 있다. 서탑은 1995년 해체보수되었는데, 이때 진신사리와 더불어 4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필사본 다라니경과 불상을 찍어내는 청동불상주조틀 등이 있었다.

장륙전의 사방 벽은 화엄석경(華嚴石經)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물 제1040호인 이 석경은 의상이 조성한 것이라는 전승이 있지만, 화엄사가 세워진 경덕왕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석경은 불행히도 임진왜란의 병화로 장륙전이 불탈 때 파괴되어 만수천점에 달하는 이들 파편만이 남아 있다. 석경의 크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전(方塼:네모난 벽돌) 정도이고, 사방 벽에 고정할 수 있는 홈이 아래위에 있다. 글자체는 쌍계사진감국사비(雙磎寺眞鑑國師碑)를 닮았다.

화엄사 영산회상도 괘불탱화는 1653년(효종 4)에 조성된 것으로서, 1997년 국보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인 구층암석등과 교지(敎旨:宣祖가 碧巖禪師에게 하사) 1매, 예조사격(禮曹寺格) 1매, 예조홍각대사첩(禮曹弘覺大師帖) 1매, 겸팔도총섭첩(兼八道摠攝帖), 예조대선사각성첩(禮曹大禪師覺性帖) 1매가 있다.

그리고, 인조 하사 어석(御席) 1건, 인조 하사 가사(袈裟) 1령, 인조 하사 어작(御爵) 1대, 선조 어필각본(御筆刻本) 1권, 선조 하사 서산대사발우〔西山大師鉢盂〕 1좌, 선조 하사 서산대사 향합(香盒) 1건, 각황전중건상량문(覺皇殿重建上樑文) 1매, 각황전삼여래사보살복장기(覺皇殿三如來四菩薩腹藏記) 1축, 고종(古鐘), 인조 14년간 ≪화엄사사적 華嚴寺事蹟≫ 1책 등이 있다.

 






 

 천은사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 인도의 승려인 덕운선사가 감로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물이 있어 감로사라 했는데 이 물 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도 맑아진다 해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1,000 명이 넘는 스님이 지내기도 했다 한다. 절이 크게 번창하여 고려 충렬왕때는 "남방제일 선찰"로 승격되기도 했다.
이 사찰은 창건 50 여년 후 보조선사가 중건을 하면서 이름을 천언사로 고쳐 지었다. 천언사란 이름이 다시 오늘날의 천은사로 바뀌게 된 것은 임진왜란으로 불 탄 뒤 절을 재건할 때까지 큰 구렁이가 감로천 주변에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는 의미의 천은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을 바꾼 뒤부터 원인모를 화재가 잦았고 화도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도 절의 수기를 지켜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4대 명필중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불을 막기 위해서는 물이 항상 흘러야 한다는 의미로 글자를 물이 흐르 듯 썼다고 한다. 이 대문에 글씨는 수체 즉, 물이 흐르는 글씨체라고도 한다. 두 줄로 세자씩 세로로 물 흐르듯 씌어진 일주문 현판 덕분인지 그 후로 천은사에는 화재도 일어나지 않고 더욱이 말랐던 샘물이 솟았다 한다.
입구에서 보이는 보제루는 2층 건물이지만 극락보전 쪽에서 보면 단층 맞배집이다 단층 쪽의 계단에서 맞은편의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설선당,승회당,첨성각이 한 영 역을 이루고 한 단 높은 뒤쪽으로는 팔상전,웅진전,진영단,칠성각 등이 또 하나의 영역이 이룬다. 이들 건물은 대부분 1774년 무렵 중건된 것들로 각각의 현판은 호 남의 명필가로 불리는 창암 이삼만,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비롯, 추사체를 모사한 것까지 다양하다. 천은사의 문화재는 천년고찰답지 않게 눈에 특별히 띄는게 적다 극락보전 안에 걸려있는 아미타후불탱화가 보물 제924호로 지정돼 있으나 극락보 전과 43.3cm높이의 금동불감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극락보 전이나 팔상전은 건축전문가들이 국보급 수준으로 평가할 정도로 뛰어난 건축물이다.

 

 






 

 실상사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 구실을 하고 있다.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강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때 300여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제2중창건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종대사가 제3중창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령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일반인들도 이곳을 찾으면 쉽게 범종의 일본을 두들겨 칠 수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과 일반인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과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앞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개산당시), 부도(36·고려), 삼층쌍탑(37·887), 증각홍척국사응료탑(38·861이후), 증각홍척국사응료탑비(39), 백장암석등(40·9세기 중엽), 철조여래좌북(41·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1584), 약수암목조탱화(421·1782)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 위토개량성책(88·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1694)등 3점이다.

중요민속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그것이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실상사에는 이렇듯 호국의 정신이 흐르며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숱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는 천년고찰이다.

 

 






 

 연곡사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절로 알려지고 있는 연곡사는 현대사의 질곡을 간직한 사연 많은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직적리 조금 못미처 자리 잡고 있다.
좁은 산비탈을 억척스럽게 일궈 만든 계단논은 평지를 놔두고 이 깊은 지리산 속에 까지 들어와 살아야 했던 고달푼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건강함을 느끼게 해준 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적들로 보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된 절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5년(1627)에 소요대사 태능이 복구하였다. 영조 21년 (1745)무렵 연곡사는 왕가에 신주목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내는 율목봉산지소로 지정 돼 있었다. 1895년쯤에도 여전히 왕가에 신주목을 봉납하였는데, 밤나무의 남용으로 문제가 생겨 망할 지경에 이르자 승려들이 절을 떠나 결국 절이 폐쇄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구한말과 한국전쟁 때 다시 파괴되었다가 근래 중창불사가 크게 이루어졌다. 경내 뒤쪽 산등성이에 있는 세 점의 부도와 두 점의 부도비, 그리고 경내 앞쪽에 있는 삼층석탑이 숱한 역사의 변화 속에서도 제 빛을 잃지 않고 있어 연곡사 찾는 기쁨을 살려주고 있다. 이들 부도는 모두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꽃을 피운 선종 계통의 문화유산으로, 연곡사가 가장 번창하였던 시기가 나말려초였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연곡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이다.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났는데, 호남지방에서도 의병활 동이 활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담양 출신 의병장 고광순. 그는 1907년 8월26일 지리산 연곡사에 근거를 설치하고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야간 기습을 받아 패전하고 순절하였다. 이때 절도 불탔다. 이를 기리는 비석이 경내에 세워진 것이 다. 피아골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에, 이를 토벌하려는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피아골의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불게 물들였기에 붙여진 것이라는 말이 있으며, 당시 죽은 이들의 넋이 나무에 스며들어 피아골 단풍이 여느단풍보다 유난스레 붉다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 피아골이라는 지명은 옛날 이곳에서 오곡의 하나인 식용 피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아골이라 하였다가 바뀐 이름이며,피아골입구의 직전리가 그런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있다.
 

 






 

 영원사

 

 


 
영원사는 불타기 전만해도 백 칸이 넘는 이홉 채의 건물로 웅장한 모습이었다. 이 사찰은 신라 때 영원대사가 창건한 뒤로 수 많은 고승 선객들이 수행했다. 그 가운데는 서산, 청매, 사명, 지안 스님들이 수행 했다.
영원사는 영원대사가 청건할 때 얽힌 일화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영원스님은 입산한 지 얼마 안 돼 현재의 영원사 부근에 토굴을 파고 8년을 계속 참선 수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깨우침을 얻지 못해 수도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나섰다. 그가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내려오다 보니 한 노인니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 낚는 시늉을 하고 있지 않는가. 이를 이상히 여긴 영원스님이 가까이 다가가니 노인이 혼잣 소리로 말했다.
" 여기서 8년을 살며 낚시질을 했는데, 2년만 더 있으면 큰 고기가 낚일 것 이다. " 그리고는 노인이 표현히 사라졌다. 젊은 영원스님은 노인의 말에 깨달은바가 있어 다시 토굴로 돌아가 2년을 더 수도 정진한 끝에 마침내 득도하여 영원사를 세우게 되었다. 영원스님의 하산길을 막고 깨달음을 주었던 그 노인은 다름아닌 문수대성 이었을 것이라고 후세 스님들은 믿고 있다.
영원사는 유서 깊은 사찰과는 달리 재난 탓인지 경내에 청매스님의 '방광사리탑'만 있고, 등 너머 산마루에 조실스님들의 부도와 각운대사의 필단사리 3층 석탑만 있다.
 

 






 

 쌍계사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4) 의상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 에서 "육조 혜능의 정상을 모셔 삼신산(금강산, 한라산, 지리산) 눈 쌓인 계곡 위 꽃피는 곳에 봉안하라" 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고 절이름을 옥천사라 하였다. 이후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중창하 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었으며, 인조 10년(1632) 벽암 스님에 의해 중건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 매표소 바로 앞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절의 좌우 골짜기에서 내려 오는 두 갈래의 물이 만나 합쳐진 것으로, 절이름이 쌍계인 연유를 짐작하게 한다. 이 다리를 건너 조금 올라가면 길목 좌우에 큰 바위 두개와 나무 장승 두 기가 문과 문지기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바위 양쪽에는 각각 쌍계와 석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고 전한다.
'삼신산 쌍 계사'라는 현액이 걸려있는 화려한 다포집인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문수,보현동 자를 모신 맞배집 금강문이 나온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역시 맞배집인 천왕 문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누문인 팔영루와 마주치게 되며, 팔영루를 통과하면 대 웅전에 들어서게 된다. 쌍계사내에는 대웅전(보물 제500호), 진감선사 부도비 (국 보 제47호), 쌍계사 부도비(보물 제380호), 적묵당(보물 제485호), 팔상전 영산회 상도(보물 제 925호)같은 지정 문화재를 비롯하여 명부전 앞의 마애불, 대웅전 앞의 석등, 각 전각의 탱화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현판과 주련 들이 많아 눈길을 끈다.
 

 






 

 칠불사

 

 


 
칠불암은 쌍계사 암자 가운데 하나이지만 인근 사람들 사이에 칠불사라 불릴 정도 로 근래에 규모가 커졌다.
전설에 의하면 칠불암은 97년 가야의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 왕국에서 시집 온 허황옥 사이에 난 왕자 10명 중에서 넷째에서 막내까지 일곱 왕자가 출가, 가야산에 입산하여 3년간 수도하다가 101년에 지리산에 들어와 현재 칠불암의 자리에 지은 운상원에서 출발하였다. 일곱 왕자는 허황옥의 오빠인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한지 6년만인 103년 8월 15일에 이곳에서 성불하여 부처가 되었는데, 이를 기뻐한 김수로왕이 절을 크게 짓게 하고, 칠불암이라 불렀다고 한 다.
칠불암의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독특한 것은 아자방이라는 온돌방 선원이다. 본디 이름이 벽안당이었던 건물로 신라 효공왕 때 구들도사로 불리던 담공선사가 구들을 놓으면서 버금 아(亞)자 모양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공간은 한꺼번에 50명의 스님이 벽을 보고 참선할 수 있는 크기인데, 이 온돌방은 한 번 불을 때면 한 달 반 동안이나 따뜻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전 쟁때 불탄 뒤 그 터만 겨우 보존되고 있다가, 1982년에 복원되었다.

 

 






 

  법계사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이 법계사이다.
해발 1,600m의 높 이에 천왕봉과 3km의 거리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어 천왕봉 등정과도 밀 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법계사는 중산리의 등산로입구에서 6km정도 천왕봉으로 오르는 3분의 2지점에 있다. 이 사찰은 신라 진흥왕 9년(548) 연기선사가 구례 화 엄사에 이어 세운 사찰로 1천5백년 가까운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절은 수난도 많이 겪어 고려 우왕 6년(1380) 왜구의 방화로 소실된데 이어 1908년 또다시 의병의 근거지였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불태웠다. 지난 38년 신덕순보살이 사찰을 복구했으나 48년 10월 19일 여순병란으로 다시 불태워졌다. 현재의 사찰건 물은 지난 81년 조재화,재연,재영씨의 불사로 세워졌다고 사찰 앞의 현판에 기록 돼 있다.
법계사 산문에 들어서면 큰 바위위에 우뚝 선 3층 석탑이 먼저 눈길을 끈다. 여느 석탑과는 달리 거대한 자연석을 기단으로해 그 가운데 3단의 괴임을 만들고 탑을 세운 특이한 양식이다. 보물 제473호로 지정대 있는데 고려초기 작품으로 추정되 고 있다. 바위 높이 3.6m, 탑 높이 2.5m의 비교적 크지 않고 간결한 탑으로 현재 의 법계사 유일한 문화재로 이 절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벽송사

 

 


 
칠선계곡으로 오르는 출발점이 되는 추성리 입구에서 왼쪽의 산길을 따라 오르면 벽송사가 고요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보광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 한 채씩 그 리고 앞쪽에 일주문과 종루, 뒤쪽에 산신각이 있는 아담한 절이다.
창건년대 등 자세한 역사는 알 수가 없지만, 현재의 절이 들어서 있는 위치에서 약 50m 위쪽의 옛 절터에 있는 삼층석잡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시기를 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중종 15 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여 벽 송사라 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 이때 불 에 타 소실된 이후 곧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건 당시 세워진 것으로 생 각되는, 높이 3.5m의 삼층석탑은 현재 보물 제 474호로 지정돼 있다. 사실 벽송사가 칠선계곡에 있다고는 하지만, 등산로와도 관련이 없고 내노라 할 문화유적이 없어 인적이 드문데, 그런 중에서 벽송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들목의 나무장승이다.

 벽송사 나무장승은 그 풍부한 표정에서 민중미학의 본질을 유 감없이 보여주는 빼어난 장승 가운데 하나이며, 순천 선암사 앞에 있었던 나무장승 과 쌍벽을 이룰 만큼 조각솜씨도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정도 되는데, 지하에 1m 정도가 묻혀 있고 썩은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둑을 쌓아 1m 정도가 더 묻혀 있 어, 드러나 있는 것은 2m 정도이다. 왼쪽 장승은 몸통 부분에 '금호장군' 이라 음 각돼 있고, 오른쪽 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음각돼 있다. 두 장승에 새겨진 명문 으로 미루어, 사찰 입구에 세워져 사천왕이나 인왕의 역할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내원사

 

 


 
삼장면 대포리 대포초등학교를 기점으로 왼쪽 길을 택해 지리산정으로 다가들며 약 2.6km를 달리다보면 깊은 계곡맛을 실감하며 신라의 고찰 내원사로 들어간다.
옛이름을 덕산사라고 했던 이 절은 무염국사에 의해 초창되었다고 한다. 내원사는 500여년 전 화재로 소실된 채 방치돼 있다가 1959 년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 다. 대웅전과 삼층석탑, 심우당, 비로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대웅전 앞 의 삼층석탑이 보물 제 1113호로 지정돼있고, 비로전 안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비로자나불 가운데 가장 오래 된 불상으로 자료적 가치가 매 우 높아 보물 제 1021호로 지정돼 있다.

 

 






 

 대원사

 

 


 
진흥왕 9년(548) 연기가 창건하여 평원사라 하였다, 그 뒤 폐사되었던 것을 조선 숙종 11년에 운권이 다시 절을짓고 대원암이라 하였으며. 고종17년 중건되었으나, 1948년 여순사건때 소실된 뒤 방치되었다가 1955년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원사 는 비구니들이 참선하고 있는 도량으로 경남 양산 석남사, 충남 예산 견성암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손꼽히고 있다.
대웅전.원통보전.응향각.산왕각.봉상루.천왕문.범종각.요사채 등 다닥다닥 붙은 대부분의 건물들은 근래 신축되어 고풍스러운 멋은찾아볼수 없지만, 나름대로 깔끔하고 청량하다. 대웅전의 왼쪽에 있는 원통보전의 지붕 모양새가 독특하며, 원통보전 뒤쪽 축대에 만들어 놓은 장독대가 볼만하다. 이미 절 입구를 가꾸어놓은 원예솜씨에서부터 비구니 절다움을 느꼈지만, 이 장독대에 이르면 절이 아니라 손맛 좋고 정갈한 안주인이 살림 하는 양갓집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깔끔하고 정갈한 문화유적은 보물 제 1112호로 지정된 다층석탑이다. 철분이 많은 화강암으로 붉은 기가돌아 석재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인 석탑은 군살 한점 없이 훤칠하게 뻗어올라가 대원사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에 있다.

 

 






   문수사
 
 

  문수사는 백제성왕 25년에 연기도사가 창건을 하였고, 원효대사와 의상, 서산, 소요, 사명대사 등이 수행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문수전 오르는 길은 기왓장으로 된 계단이다. 대웅전은 쌍봉사 대웅전을 닮았다. 삼층으로 된 목조건물이다.
대웅전 옆에는 반달곰 우리가 있다. 대웅전은 동남 아시아의 한 절을 연상시킬 만큼 이국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해우소에서 키우는 똥돼지도 유별하다. 구례에서 하동 방면으로 19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오미리에서 문수사행 표지를 따라 7km 오르면 문수사다. 가파른 산비탈 시멘트길이지만 줄곧 덕은내 계곡이 함께해 지루하지 않다.

 






   
   
 
*사찰의 자세한 내용(창건,중창,법맥,...)을 보려면 [달마넷]이나 각 사찰 홈페이지로 이동해서 검색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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